1006-1010
1. 1006
다이어리를 밀려서 쓰는 중이다.
사실은 10/9 월요일에서 10일 화요일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유례없던 꿀 같은 황금휴가였고 일은 어떻게 하는 거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느낌이다.
연휴 동안 얘기할 거리는 연휴가 참 길다, 좋더라 하는 대략적 총평만을 짧게 남겨 둘 수 있을 것이고 구체적으로 무얼,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선 별다른 쓸 말이 없다.
2. 1007
엄마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었고 기억에 아로새길 사건들이 없었다는 건 머리가 텅텅 비워지도록 비움을 실천했다는 근거일지도 모르겠다.
시집은 언제 가냐, 애는 언제 낳을 것이냐, 이런 잔소리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건 엄마, 나, 동생 이렇게 셋의 단출한 핵가족이 하루 걸러 어찌 사는지 빤히 들여다보는 사이라 새삼스럽게 걱정해줄 이유도, 충고도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 집으로 건너와서까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 명절 특수 쓸쓸함의 고배를 여지없이 느꼈을 테지만 단 하루도 혼자 있진 않았다.
신기하게.
3. 1008
동생과 따로 또 같이 엄마의 작은 집 공간을 나눠 쓰다, 뭉쳤다, 다시 해체했다.
심심할 때쯤 제 방에서 한 번씩 쏙 나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툭툭 던지고 웃게도 만들다가, 신경을 슬슬 긁기도 하다가 설거지나 청소 같은 적당한 일거리를 만들어주고 들어가 버렸다.
연휴 첫 2-3일은 대청소랍시고 집을 들고 엎어 정리하느라 힘들었던 것을 빼면 그 이후부터는 적당히 가벼운 소일거리 정도만이 이어져서 산뜻한 기분으로 해낼 수 있었다.
(엄마 집 대청소 겸 대 정리정돈을 위해 이케아를 3번씩이나 다녀왔음)
올레티브이로 직접 영화를 찾아본 건 1편이고 대부분은 TV 채널을 열심히 돌렸다.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 재밌게 본 프로그램을 다시 보고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그램들을 골라보고 추석 특선영화들도 안본것들로 챙겨보았다.
자고 싶으면 자고, 자고 싶지 않아도 잠을 쥐어 짜내 자보았다.
동글이 곁에 종일 붙어 있으면서 끼니도 챙겨주고, 만져주고 놀아주었는데 제 집에 들어가 신경질을 부리듯 바닥을 박박 긁어대는 걸 보니까 약간은 귀찮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4. 1009
엄마의 퇴근 시간을 모두 맞아주었고 까까 먹고 싶다고 애교 피는 서른 살 동생의 투정에 못 이긴 척 간식 봉지를 던져 주었다.
읽은 책을 챙겨 왔지만 한자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스트레스받지는 않기로 했다.
뭐든, 절박하게 절실하게 꼭 해야 될 일이란 건 적어도 내 손으로 챙겨 온 일들 중엔 없다.
가을이면 들로 산으로 열심히 나들이를 다녔던 엄마가 같이 다니자 했을 때 많이 따라다녀둘걸 그랬다.
요즘은 내가 한번씩 자연 속에 파묻히다 오고 싶은데 엄마 무릎이 성치 않아 함께 다닐 수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다 때가 있는 거라던 어른들 말을 빌어 생각하면 상황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그때 하고 싶은걸 함께 하고 지켜봐 주는 게 나에게도 남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때 참 좋았었지- 사건 한 번에 몇 년을 돌고 돌 이야기와 역사가 생겨나기도 하니까.
5. 1010
돈은 많이 벌고 싶은데 엄마 고생 안 시키고 싶은데 뜻대로 잘 안된다고 술김에 찡얼거리던 동생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다음날이면 제 먹고 싶은 것만 잔뜩 말하고 골부리는 동생이, 집안일 몇 개 도와주고 잔뜩 생색내는 동생이, 나이도 몸도 클 대로 큰 두 자식을 여전히 아이처럼 귀여워하는 엄마가, 엄마도 힘이 든다고 남의 집 자식들과 비교하며 신경질 부리는 엄마가, 아들 딸 건강히 한 집에 있어 잠이 잘 온다던 엄마가
그 모두가
긴 연휴 동안의 내 가족이자 사랑이었다.
가장 일상적이고 아무것도 한 것 없어 보이는 이 연휴가 참 평화로웠다.
붙어서도 숨 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시간, 시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