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서른한살의 고백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는 늘 2-3명 정도 있었다.
둘에서 셋.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나는 이제 좀 여러 명을 만나 대인관계를 넓혀보겠다 하며 작정하고 만나도 새로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소원해지는 사람도 따라오면서 교류하고 있는 인원은 늘 둘에서 셋이었다.
방황과 고독기를 반복하면서 둘셋의 얼굴들이 몇 번 바뀌기는 했으나 다시 제자리를 찾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얼굴의 내 친구들은 다들 멀리 시집을 가버렸다.
그중 함께 가장 젊음을 불태웠던 강원도 동해 친구가 오랜만에 친정집엘 왔다.
내가 자주 동해에 가진 못하지만, 그 친구가 올라올라 치면 버선발로 달려 나갈 것 같이 말해두고선 나 바쁘다는 핑계로 가까이 올 적에도 자주 만나지 못하여 늘 미안했다.
그 친구의 결혼식날 식장에서 얼마나 울었던가,
그렇게 멀리 시집가 버리면 언제 보나 싶어 서러워 울었으면서, 종종 올라올 적에는 금세 미적지근해져 버렸다.
김 빠진 연인 사이처럼 친구도 그랬다.
그래서, 그 친구는 자기 나름대로 나는 또 내 나름대로 토라지기도 했었고, 서로 달라져버린 상황과 생활들에 치여 급하게 만남을 이어가지 않아도 별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제풀에 스르륵 토라진 끈을 놓아버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라고 불러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이 사무쳐 올 때가 있다.
그럴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약속을 정하고 보기로 한 시간을 기다린다.
나에게 진짜 형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가 먼저 결혼했고,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어도 오빠라고 부를 수도 없고 딱히 부를 말도 없어 친구의 남편을 형부라고 부르는데, 그 형부도 같이 보게 되었다.
새로 나온 복 받은 부라더를 달라고 했는데 그냥 부라더 소다를 주어서 투덜대다가 어차피 둘 다 먹을 거기 때문에 순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소주를 조금 타서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 없이 할머니랑 있을 수 있다는 조금 더 자란 아기 얘기, 형부의 근황 얘기, 친구와 내가 함께 아는 친구들의 근황 이야기.
우리 둘만의 이야기는 점점 밀려나고 없었다.
멀리 있던 탓에 보고플 마음이 마를 새 없이 문자나 전화로 그때 그때 풀어내서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때마다 지나간 추억에 대한 아낌없는 회상은 지금의 자리나 위치를 담담히 받아들이게 했다.
나의 전재산 3만 원 중 2만 원은 친구 아기가 좋아한다는 하리보 젤리를 사다 주었고,
1만 원은 노래방 룸비를 내고 나니 새벽 2시가 되어 헤어지게 된 후에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고 있었다.
친구와 남편이 간 것을 확인하고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젖은 비와 눈에 머리는 축축 쳐졌고, 눈송이는 이마를 딱딱 때리듯이 내려 차갑고 얼얼했다.
그 시간에도 간간이 길을 걷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괜히 부끄럽고 숨고 싶어 졌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빽빽하게 줄을 지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득 찬 시야는 1평짜리 나만 살고 있는 공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나이 서른하나
돈이 없어 택시를 못 타고 눈 비를 맞아 집에 왔다.
아마 소나기가 내렸다면 나는 친구에게 부탁이란걸 할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