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싶은 것과 버릴 것

일기라는 과거

by 사막물고기



사람의 마음이,

아니 내 마음이

쉽게 말해 간사하다고 하는 그 마음이.

조롱의 티끌 하나 없이 남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있을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문득의 발단은,

역시나 가까운 이들의 삶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온다.


한 겹 들추어 들여다보면 누구 하나 쉽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곁을 지켜온 친구로서 나의 친구가 꽃길만 걸었던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큰 아픔 없이, 적어도 그 친구의 삶의 기준 안에서는 '행복하다'라는 감정과 생각을 자주 품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새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한 지 막 한 달이 넘어, 설렘이 담뿍 담긴 표정은 참 예뻐 보였다.


허세가 조금 담긴 자기 자랑도 마냥 귀여워 보였다.


그랬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기 전까진.


친구 : 남자들은 나를 쉽게 생각하나 봐

나 : 왜?

친구 : 결혼 이야기들을 쉽게 꺼내는 거 보면,

나 : 결혼 이야기가 왜 너를 쉽게 보고 꺼내는 이야기라 생각해?

친구 : 내가 쉽게 결혼해줄 것 같은 여자로 보여서 그러니까?

나 : 항상 결혼 상대자로 연애가 고팠던 나는 부러운 소리다.


그 친구 생각대로 쉽게 보고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거였다면 얼마든지 쉬운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들어차는 서글픈 감정들이 이성적이고 온화했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철수를 부르면 영희가 생각나듯이, 나도 한 번쯤은 누군가의 대외적으로 알려진 연인이 되고 싶었었다.


나에겐 이루어지지 못한 소망 같은 일들이, 친구는 다른 이유로 노여워하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자기 스스로의 문제는 너무 깊이 자신을 탐닉하는 것에서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자신 안으로 집중되어 있는 관심과, 고민들을 타인에게로, 바깥세상 이야기들로 돌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내 아픈 말들은 기가 막히게 잘 골라 주워듣는다는 것에서 과잉된 자기 생각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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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의 상념과, 상처로 귀결될 기우들을 겹겹이 포장해둔 채 말이다.


그 단적인 예가 21살부터 모아둔 다이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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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이후로 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음울한 철부지 10대의 감성은

짐을 많이 만들어두지 않는 쪽에 집착하여 병적으로 물건을 내다 버렸고,

나이 듦과 성숙이라는 자연적 치료는 삶에 대한 책임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단순하게 살고 싶어 지는 지금이 되기 전까지는 '기록'의 습성이자 취미로 '잘살고 있다'는 자위 도구를 한해 한해 생산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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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의 책 저자 사사키 후미오는 개인 기록에 대한 정리 방법으로 '스캔'을 알려주었는데, 스캔하는 작업도 한 두 권이 아닌 일기들 앞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먼지만 먹다가 한 번씩 펼쳐보고 뒤적여 볼 때나 만져보게 된 '짐'으로 바뀌었다.


그 짐 좀 줄여보고자 버릴 것을 추려보았으나 가계부 몇 권 외에는 버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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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줄면 홀가분하고, 사라지면 찾아보고 싶은 것들.


후자의 경우 때문에 만들어 둔 무덤 덕에 한 번씩 도망칠 곳이 생긴다.


그러니까 짐덩어리라는 단어와 같이 하찮음 보다는 애물단지 정도의 분명 귀함이 깃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일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때문에 아프고, 떠난 사람엔 더 애석해하는 미련을 떨고 있었지만

서른 하나의 내가 스물하나였을 적의 이야기를 다시 볼 때면 더 답답해진다.


어리고, 젊고, 가능성이 많고, 배움의 기회가 많았던 환경 속에서

주변은 돌아보지 못한 채 그저 나 하나만을 꼬집고 쥐어뜯고 못살게 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동떨어진 기대치와 규율들.


그리고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지금에도 힘을 내서 달려가야 할 지점이 분명 있음에도

나의 문제적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끊임이 없었다.


번복되는 상처에 지레 집어먹을 두려움에 대한 기록이 사라지면 좋겠다.


다시 헤어지게 되더라도 담뿍 사람을 좋아해 보고 싶고,

일련의 작은 습관들에 실패해도 금세 시작할 가볍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필요치 않게 되어

이 일기장들을 훌훌 태워버리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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