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썼으면 어쩔 뻔 했나?
장애아 키우는 워킹맘의 생각
늘 사표가 내고 싶었다.
1. 초등 교사가 된 이듬해 사직서를 내려고 했다. 사각형 교실이 답답했고 넓은 세상이 궁금했다. 정해진 길만 따라 직장인이 되었는데 1년 학교살이를 해보니 평생을 이렇게 반복하며 산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2.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직서를 내려고 했다. 비장애아를 키우는 워킹맘도 고비고비 사표 쓸 위기가 있는데 장애가 있는 내 아이를 두고 남의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이 참 모순적으로 느껴졌고 엄마로서 조금 더 신경 써주면 아이의 장애가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실제 육아휴직 3년, 간병휴직 2년을 하기도 했다.
3. 몸과 맘이 고단할 때 사직서를 내려고 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퇴근해서 집에서도 J에게 시달리다 보니 이러다 몸이나 마음에 병이 들겠다 싶었다.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하는 것이 장애아를 기르는 엄마의 숙명이 아니던가? 나는 병듦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랬던 내가 여전히 교사로 살고 있고 장애가 있는 내 아이는 16살이 되었다.
요즘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표를 냈으면 어쩔 뻔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답답하기만 하던 교실이 방해받지 않는 내 공간으로 느껴진다. 집에 내 공간이라고 할 곳이 없다. 내 공간을 어찌어찌 만든다 해도 J의 방해로 심리적으로 온전한 내 공간을 확보하긴 어렵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특징상 아이들이 하교하고 나면 교실이 온전한 내 공간이 된다. 요즘은 퇴근 시간이 지나도 교실에 앉아서 책도 읽고 온라인 연수도 듣는다. 가끔 토요일에도 내 교실에 와서 이런저런 일을 한다. 코로나로 카페 같은 곳이 찜찜할 때 완벽하게 안전한 내 공간이 되는 교실이 있어서 너무 좋다.
2. 나이가 들수록 나만의 일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 누구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내 커리어가 있고 경제적 자립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3. 말을 지독히도 듣지 않고 가르쳐도 뭔가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J와 달리 우리 반 아이들이 내 아들에게 느끼는 결핍, 욕구 불만을 채워준다. 사실 J를 키우다가 우리 반 아이들을 가르치면 '그래... 나는 아이를 잘 키우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어!!'라는 자존감이 저절로 되살아 난다.
4. 장애아라도 나이가 들 수록 엄마의 손이 덜 필요하다. 아니 덜 필요하게 환경을 세팅해야 한다. J가 중3이 되고 활동보조사 쌤도 봐주시다 보니 내 시간이 생기는데 그 시간을 의미있게 보낼 수 있어서 좋다.
아마 내가 초등 교사여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른 직장에 비해 퇴근시간이 말도 못 하게 빠르고. 휴직, 연가, 조퇴 등도 자유롭고 직장 환경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또, J를 키우며 생긴 노하우를 학교에서 활용할 수 있다. 그 반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긴 노하우를 J에게 적용할 수도 있다.
여하튼 문득 "사표 냈으면 어쩔 뻔 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긴긴 추석 연휴(너무너무 답답하고 힘들었음.ㅠㅠ)를 끝내고 학교에 와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걸 보면 정말 이제 초등 교사가 천직처럼 느껴진다.
이런 나를 보면서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은 생각은 없고 상황마다 판단은 바뀔 수 있으며 나 자신 역시 변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매일 사표 쓰고 싶었던 내가 20년 뒤 교실에서 편안함, 뿌듯함, 성취감을 느낄지 그때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일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