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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n mu Mar 20. 2023

세균의 세균은 아닙니다만,

- 그래도 세균은 맞네요.





우리 아빠 항렬은 '균'자 돌림이다.

고를 균(均).

어릴 때는 우리 아빠 성함을 제외하고 큰아빠들이나 작은 아빠들 성함에 관심도 없었고 그런가 보다 했다.

작은 할머니가 막내 삼촌더러 "학기니 학기니"라고 해서 정말 이름이 학기인 줄 알았는데 정확히 '학균'이다.

성도 박 씨인 데다 마지막 글자가 '균'으로 끝나다 보니 이름들이 만만치 않다.

장균, 동균, 민균, 학균, 대균 그리고 세균.

학기니 뿐만 아니라 민기니, 대기니, 세기니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균.

우리 아빠의 막내 동생.

2남 3녀 중 맏이와 막내.

대균이와 세균이.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뵌다면 물어보고 싶었다.

삼촌 이름을 왜 이렇게 지었냐고 말이다. 세균이라니 막내아들 이름이 아무리 의미가 좋대도 불려지는 건 세균이지 않는가.

아직도 '작은 아빠' 대신 '세균이 삼촌'으로 불리는 나의 삼촌은 애증의 사이 같다.

내 부모님에게도 나에게도 애증의 관계.


삼촌이 미운 건 나의 부모님을 참 힘들게 했다.

결혼 전 철이 없을 때도 그랬고 결혼을 해서도 삼촌은 나의 부모님에게 힘든 존재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삼촌에게는 나의 아빠보다도 더 빈자리는 컸겠지만 그만큼 나의 아빠는 부모님 대신이라는 위치에서 부담도 책임도 컸으리라 생각한다.

신경은 쓰지만 서로에게 살가운 존재는 아니라 마음과 다르게 늘 어렵고 어색한 사이였으리라...


내가 삼촌을 미워하게 된 순간은 이때였다.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할아버지 혼자 계셔서 우리 집은 시골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합가(家). 시아버지와 함께 사는 며느리 그게 우리 엄마였다.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는 예전 어른임에도 며느리를 많이 배려하고 조심하시는 시아버지였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도 엄마가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한 기억도 없고 말이다.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한 아빠의 덕도 있겠지.

엄마가 잘하기도 했지만 늘 엄마에겐 엄마의 편에서 얘기해 준 아빠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의 할아버지는 폐암과 싸우느라 병원과 집을 오갔고 그 일은 엄마와 아빠가 했어야 했다.

당시 엄마는 빨간 티코를 끌고 다니며 할아버지를 태우고 서울을 오가며 할아버지 건강에 신경을 썼다.

그때 나는 5학년, 여동생은 2학년.

우리 자매는 엄마 아빠의 돌봄을 예전처럼 받지 못했고 고모집에 며칠 얹혀서 학교를 가곤 했다.

그땐 학교와 고모네 집이 가까워 걸어 다니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철이 없었지..

여름방학이 되어서 우리는 결혼한 삼촌네로 이동해야 했다.

이유는 고모네가 지인들과 여름휴가를 가는데 우리를 데려가기 애매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여름밤, 잠을 자고 있는데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 깼다.

술을 먹고 온 삼촌과 작은 엄마가 다투고 그 둘을 중재하기 위해 가까이 사는 고모부가 와계셨다.

난 깜깜한 방에 누워 듣고만 있었다. 다행히 동생은 잠에서 깨지 않고 자고 있었다.

사건은 할아버지 간호에 엄마와 아빠가 힘드니 삼촌이 교대 한번 했었는데 그날 저녁에 오신 작은할아버지-할아버지의 동생, 아빠의 작은 아버지-가 나의 부모님에게 고생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안 한 것이 시작이었다.

작은 엄마는 놀라 울고 술을 먹은 삼촌은 자신의 의견만 내세우고 고모부는 이야기를 들어주며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바빴다.

다음 날 삼촌 부부는 아무렇지 않은 사이가 되었지만 혼자 이 상황을 들은 나는 예전처럼 그들을 대하기 어린 나이임에도 어려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촌이 자녀를 낳아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도 내 나이의 숫자가 올라가도 그들이 마냥 좋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몇 년 전 삼촌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고 마침 명절 때여서 본가에 갔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다.

병원의 한쪽 정원에서 다른 환자들과 서 있는 삼촌의 모습이 이상하게 서글펐다.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오는 삼촌을 보고 울면 안 되었는데 눈물이 나서 울었다.

이 미운 사람 앞에서 울다니 자존심도 상했다. 

삼촌은 왜 우냐며 와줘서 고맙다고 내 등을 토닥였다.

난 그날의 내 눈물의 이유가 궁금했고 그것은 내게 남은 삼촌의 추억이 있어서 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삼촌이 밉다.

우리 아빠에게 포기할 수 없는 짐 같고, 우리 엄마에겐 착한 골칫덩어리.

삼촌의 누나 셋-아빠의 여동생들-은 본인들보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남동생이 마냥 불쌍해 무슨 일이 생겨도 남동생의 편만 들고 물질적으로도 많이 지원해 주었다.

우리 아빤 어쩌면 그들에게 외톨이였을 것이다. 

받는데 익숙해져 그랬을까.

그래서 그의 행동들이 난 미웠고 삼촌의 자식들도 안 예뻤다. 나이 차이 나는 사촌 동생이었지만 미웠다.

하지만 그 추억이 뭘까.

아마도 크리스마스의 선물만이 생각난다.

기억도 안나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잠을 자고 일어나니 나와 내 동생 머리맡에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커다란 선물이 나란히 있었다.

진짜 산타가 왔다고 너무 좋아했던 우리는 나중에 삼촌이 준비해 준 선물인걸 알았지만 아직도 산타의 선물이라고 하면 그 선물이 생각난다.

거친 남자의 손으로 골랐을 여조카들을 위한 선물.

틴케이스도 있었고 공책이며 연필이며 같은 소소 한 것이었지만 행복이었다.


그 행복이 뭐길래 이리도 미운 사람에게 애정이란 게 남아 있을까.

밉다. 정말 밉다.

그러면서도 불쌍하다. 짠하다.

점점 작아진다. 그가..

그래서 미움이 있는 내 감정이 또 밉다.


그래도 내가 아는 세균, 애증의 세균이 행복하길 바란다.

밉지만 내 진심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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