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 업 쇼트 ; 특정 기준이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독립)
‘커밍 업 쇼트 (제니퍼 M. 실바)’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데 너무나도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쁠 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을 걷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대여섯 명이 무리 지어 꺄르륵 웃고 있었다.
그 소녀들이 문득 불쌍했다.
어떡하니, 너희도 곧… 성인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 소녀들의 웃음이 사라질 근 미래, 5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태도와 방향성을 정해야 한다. 그래야 낭비를 막는다.
근데 삶 자체가 낭비 아닌가…?
다시, 그냥 이대로 낭비하면서 사는 건 포기하고 회의적으로 살아가는 건데 이대로 괜찮나?
일은 있어야 한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대학에 화가 나는 점.
배운 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더 알려주던지, 인맥을 늘릴 수 있는 기회를 더 주던지.
결국 대학은 돈만 벌어가고 나에게 남은 건 ‘대학’은 무의미한 연구기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대학을 가는 이유는 학위를 가지면 더 고소득 직업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을 갔는데… 대학은 취업의 또 다른 관문이었더라. 이걸 빨리 알려줬더라면. 그리고 내가 이미 세상의 톱니바퀴라는 걸 알 수 있었더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네모난 톱날이 될지, 세모난 톱날이 될지 정도라는 걸 알았더라면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리석지 않았다면.
톱날이 무뎌지면 대체되는 게 두려워서 사회에 나가고 싶지 않아 했다.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가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난 여전히 내가 무얼 선택할 수 있는 건지 모호하다.
길을 걸어서 집에 오는 길에 3층 되는 상가가 눈에 띄었다. 1층 국밥집, 2층 수학학원, 3층 과학학원…
상가에서 돈을 버는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그 돈을 아이들에게 투자해서 계층이동(상승)의 기회를 늘리도록 노력하지만
태생적 한계, 그러니까 원래부터 집안에 의사, 판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이 있는 집안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경력, 사회제도를 자본으로 바꾸는 방법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지 않다.
계층이동에 성공해 안정적인 돈벌이 수단, ‘일’을 마련한 사람들은 정말 행운아다. 물론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공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까지 그들이 겪은 비극과 역경을 이겨내지 않았다는 것도 아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배운다면 앞으로 어디서 일하게 될지, 저 자신을 계속 믿을지, 그런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 자신을 믿는 게요.’ ….
혼자 힘으로 성공했다는 식의 자아서사를 …. 의붓아버지의 경제, 문화 자본 덕분에 중간계급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은 얼버무렸다. ….
‘나는 고된 노동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데 있어 문화, 경제적 자원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 같은 책, 107p.
내가 묘하게 언니에게서, 혹은 뉴스 인터뷰에서 간혹 보는 사람들, 이를테면 ‘나 자신을 믿는 게 중요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반감이 드는 이유다. 일단 언니는 자기 자신이 잘 나서 성공(안정적인 직업)한 줄 아는 사람이다. 환경이 영향을 줬다는 걸 일부 인정하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이 더 중요했다고 믿는다.
가끔 잘 모르고 순진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서, 그때까지 순수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란 게 너무 부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뒤틀린다. 그리고 결국엔 나도 언니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자격지심으로 들릴 수도 있다. 또는 내가 자신감을 회복하면 언니처럼 개인의 노력을 맹신할까 봐 두렵고 그렇게 된 스스로를 상상하면 너무 구리다. 하지만 잘 되고 싶다.
가끔 불안감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도 든다.
갖지 못하면 부숴버려…
그렇다. 나는 포기를 하려는 나를 발견하고 분노를 파괴적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꾸준함… 치열함…. 그래, 나는 그런 가치들을 동경했다. 지금도 그런 꾸준함, 반복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부럽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사회를 이루고 지금까지 거쳐온 날들 동안 사회제도는 수도 없이 변화해 왔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에 기대를 걸면서 살아본다면 나는 조금이라도 이런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까지 대학에서 얻은 학위장을 경제적 소득으로 변화시키는 걸 포기하더라도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활동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꾸준하게 해낸다면 나도 남들이 보기에 치열함을 갖춘 전문성 있는 사람이 되어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에 자유와 여유를 획득할 수 있을까?
일단 해봐야 아는 일들이 생겼다. 규칙성, 반복, 꾸준함.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남으니까, 그래서 청소년기에 공부하는 걸로 유세 떨면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밥은 자동으로 차려진 걸로 생각하고 그 맛을 평가하고, 남이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졌을 때 배 아파하며 나도 저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듯이 낭비한다.
가끔 착하다는 가치가 이 사회에서는 정말 인정받지 못한다는 걸 느낀다.
자신의 시간을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조금씩 남겨두어 함께 먹을 음식을 차린다던지 하는 것보다
남들보다 더 많은 개인시간을 확보해서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것에 더 좋은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정말 그런 걸까. 이제까지 내가 너무나 이타적이어서 후회가 되는 일들을 나는 지금처럼 이런 후회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걸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