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과 고은영.
은영은 인생이 제 맘대로 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초등학생 때 자주 하던 놀이가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의 금을 밟지 않고 영어학원에서 동네 마트까지 걸어가기, 마트에서 인사를 하면 인사성 밝다고 마트 아주머니가 칭찬할 거라는 예측하기, 영어학원에 가서 단어시험을 보면 다 아는 단어만 나와있는 상상…
은영은 늘 정확히 보도블록 덩어리들만 밟았고, 횡단보도 위, 흰색 페인트 위를 종강종강 건넜다. 월, 수, 금 4시면 여지없이 방문하는 마트에서는 아주머니가 야채코너를 손수 정리하고 있었고, 은영은 밝고 우렁차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그 활기찬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아주머니는 말한다. “은영이 왔니! 아휴, 인사도 잘하지.” 가나 초콜릿을 사서 가장 친한 친구와 나눠먹으며 영어학원으로 돌아간다.
갈 때는 모든 규칙이 사라진다. 모든 게임이 그렇듯이, 기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그 스테이지는 스킵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클리어한 ‘금 밟지 않기’ 미션은 성공했기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밟았다 하더라도 돌아갈 때 다시 시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영은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영어학원에서는 선생님이 시험지를 자리에 놓고 있었다. “얘들아, 서로 cheating 하면 안 돼~”
역시, 시험지를 보니 모두 아는 단어다. guess, technique, capitalism, laugh, activate, gaze, search, evolution, dragon, quote, memory. 문제는 총 11개이고 그중 한 문제는 보너스 문제였다. 20개 단어를 외우고, 그중 11개 단어가 나오는 것인데 10개 맞으면 100점, 보너스 1개 더 맞으면 똑같이 100점이다. 보너스를 맞추면 선생님이 채점해 주면서 빨간펜으로 귀여운 스마일을 그려주는데 그걸 받고 싶어서 은영은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인생이 쉬웠던 것 같은 감각이 있는데, 그건 그때가 즐거워서 그때의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 제 맘대로 된다고 상상하는 놀이를 즐겼던 것뿐이지, 돌이켜보면 마냥 제멋대로 되는 건 없기도 했다.
학교에서 반장을 하고 싶었는데 미화부장을 하게 되기도 했고, 옆자리 친구는 만날 지우개를 빌려가고 돌려주지 않아서 재촉해야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은수와 은영의 한자공부를 담당했는데, 한자를 처음 배울 때 산수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필통에 있는 핀볼게임을 할 때 은색 공은 은영이 원하는 곳에 한 번에 정확히 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은영은 은색 공이 한 번에 정확히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은영은 회상에 젖어있다가 빠져나온다. 지금, 제멋대로 안 되는 게 많아서 화가 나고 초조해 있는 모습은 과거의 은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은영은 지금의 자신이 더 어색하고, 불편했다.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지금 느끼는 것이지, 계속하다 보면 될 때도 있다는 걸 그 옛날의 어린 은영도 알고 있던 사실인데, 새삼 은영은 자신이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은영은 당장 자기만의 책상,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집, 자기만의 일이 없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게 그 얼마나 의미 없는 재촉이었는지 깨닫는다.
다만 은영은 계속해서 자기만의 삶을 반복할 뿐이다. 반복, 반복, 반복…
은영은 그 반복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혹자는 그 반복 끝에 오는 결괏값이 시원찮으면 낭비였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혹자는 그 반복이 너무나 오래되면 이젠 그 무용함을 깨닫고 그만두기를 권하기도 한다. 은영은 혹자의 말이 커다란 저주의 결과를 낳을까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건 지나가는 바람이 될 수도 있음을 안다. 은영은 혹자의 말보다 자신의 말을 듣기로 한다. 경청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