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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십 Jul 20. 2024

선명한 것과 희미해지는 것.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 못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게 선명해지는 것 같다. 은수는 종이의 글씨 위에 스포이드로 물방울을 얹는 취미가 있었다.



- 굴절되고 확대된 글씨는 마치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차원을 이동한 것 같아서 좋아해.


종이 섬유에 물이 스미면 아주 오래전에 인쇄된 잉크여도 약간은 번지듯이 경계가 흐려진다. 글씨는 다시 원래 종이 위에 인쇄된, 선으로 그려진 2차원의 것으로 보였다. 은수는 내 팔 위에도 물방울을 얹었다. 내 얼굴의 모공에도, 개미 몸통에도, 휴대폰 액정에도 물방울을 얹었다.


확대된 무언가는 내가 안다고 믿었던 그것의 모습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꽃매미가 우는 소리가 한창 들리는 여름의 주말엔 이불 빨래를 했다. 습도가 높은 날엔 섬유의 사이사이에 물기, 땀, 무언가 끈적이는 액체가 뒤엉켜 이상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은수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엔 건조기가 생겼다. 전자기기는 작동하면서 열을 내기 때문에 이불 빨래를 하는 저녁이면 우리 집은 더 뜨거워졌다. 오래된 에어컨을 작동시키기보다 선풍기가 만들어내는 미적지근한 바람을 즐기는 은수와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세탁기에서 축축하게 탈수된 묵직한 이불을 건조기로 옮겼다.


건조기 안에서 시계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덜컥 반시계방향으로 뒤바뀌는 소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저녁으로 토마토 냉 파스타를 먹었다. 파스타 면을 끓는 물에 9분 동안 삶은 뒤 각자의 그릇에 면을 옮겨 담고 그 위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오뚜기 토마토소스를 세 숟가락을 퍼 올리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날은 무더워도 양초에는 불을 붙였다. 은수가 불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식기건조기에서 막 건조를 끝낸 머그컵에 냉장고에서 꺼낸 보리차를 따라내면 수면까지 머그의 표면에 동그란 수증기가 셀 수 없을 만큼 맺혔다. 나는 이걸 은수에게 보여주면 은수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은수는 컵 표면에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을 보고 울었다. 은수의 눈물은 동그란 물방울이 되어 바닥으로 낙하했고 바닥에 닿자 터져 납작해졌다.

은수는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왜 울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물방울. 은수. 확대된 세계. 거기에 ‘수많은’이라는 조건만 붙었을 뿐인데. 은수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세계에 대해 두려웠나. 내가 아는 진실은 없고 수많은 사실만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은수는 알고 있었다. 라쇼몽을 읽은 날에도 은수는 울었다.



은수가 끝내 헤어지자고 한 일요일의 풍경도 선명해지다가 끝내 흐릿해지는 게 쇠라의 그림 같았다. 가까운 건 선명해지고 멀리 있는 건 희미하게 보이는 건 먹구름이 낀 날도, 뜨겁게 빛이 내리쬐는 날에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걸 일요일 아침에서 알게 되었다. 은수가 태어났던 섬으로 향했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 7시의 바다는 은색 스팽글 다이어리처럼 반짝였다.


- 내가 섬을 떠나기 전에 비밀을 바다에 숨겨놓고 왔는데, 뭔지 알려줄까?


은수는 확실하고 정확하게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비밀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할 때도 궁금하지 않았다. 은수가 말하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상관없었다.


- 바다에 빠져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 고등학생 때였나. 한 없이 가라앉고 있는 와중에 시커먼 바다에서도 무언가 빛나는 게 보이는 거야. 사실 본 건지도 잘 모르겠어. 느낀 것에 가까운 걸지도 몰라. 이제 곧 다른 세계로 떠나거나 새로운 무언가로 나는 다시 존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떨어진 거지만... 바다의 무게나 먹먹한 고요함이 나를 눌러오니까 두려워서 그냥 눈을 감았거든.


은수는 손에 쥔 포카리스웨트 캔을 만지작거리며 맺힌 물방울을 닦았다.     


- 어느 순간 환해지더니 갑자기 나는 땅 위에 서 있더라고. 떨어지기 전의 내 모습으로.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환하더라.


멀리 있는 모든 게 희미해서, 은수는 희미한 게 싫어서 모든 걸 크게 볼 수 있는 커다란 물속으로 점프했다.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는 날을 제외하고 모든 날에 은수는 다이빙했을 것이다. 먹구름이 낀 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의 그날의 은수는 선명하지 못한 모든 걸 두려워했다.


은수는 100m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21초 만에 100m를 주파했다. 그래서 차라리 은수는 헤엄치기로 한 것이다. 파도를 잡고 나아가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은수는 가라앉기로 한 것이다. 수면 아래로.


-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네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는데 갑자기 땅에 서 있게 됐다는 거야?


은수는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나도 은수의 눈을 들여다봤다. 검은 눈동자는 멕시코 세노떼를 떠올리게 했다.     

- 어떻게 가능했냐가 중요한 게 아냐.


은수는 꼭 원뿔모양의 모자를 쓰고 자수정 구슬을 쓰다듬는 점술가 같았다. 차라리 은수를 껴안았다.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두 팔을 떼네고 은수는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 우리 여기서 그만하자. 이젠 혼자서도 충분해.



먹구름이 끼는 날에 모든 게 선명해 보인다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공기에 가득한 수분기는 멀리 있는 것을 더 푸르게 보이게 해 줄 뿐이라는 것을 그 맑은 날에 깨달았다. 이제서는 충분하다는 은수의 말이 컵에 맺힌 수증기 바라보기를 혼자서 충분히 해낼 수 있게 됐다는 뜻인지 궁금했지만 그냥 은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희미해지던 선명해지던, 가까워지던 멀어지던 은수와 나는 그 해 여름을 충분히 선명하게 보냈기 때문에 아쉽지 않았다. 이불까지 침투한 습기가 물러날 차가운 공기가 돌아올 무렵이면 은수와 나는 서로에게 충분히 희미해져 있을 걸 알아서 나는 은수의 비밀과 함께 희미해지는 게 두렵지 않았다. 건조기는 혼자서도 충분히 돌릴 수 있었다. 나도, 은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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