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사랑해야 한다.

by 이오십

<la vie devant soi>


진부한 말이지만 우린 모두 살아있음으로써 죽음의 과정을 밟고 있다. 죽음에 내포된 게 생인지, 생이 내포하고 있는 게 죽음인지... 아마 영원히 꼬리물기를 하는 뱀의 형상일 수도 있겠고,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간에 살아있다는 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것이어서 불안하기도 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짤막한 한토막의 문장을 보게 되는 것보다 소설 전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생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로자 아줌마는 평생 7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살았다. 그리고 더 이상은 계단 오르는 게 불가능해졌을 때는 7층에만 쭉 머무른다. 그리고 가사상태에 빠져 오락가락할 때, 모하메드(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부축하며 지하 1층의 창고,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의 동굴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모모는 아주머니가 죽고 나서도 한참 그곳에서 지낸다. 초를 켜주고,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얼굴에 화장을 고쳐주고, 한 두 번 뽀뽀도 해주고. 향수도 뿌려준다.


"나는요, 자연의 법칙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요, 롤라 아줌마."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어요. 구역질 나는 그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나는 일어섰다. 인공적으로 만든 그녀의 가슴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컸다. 난 그래도 그녀가 좋았다.

- 308p(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 함께 기도문 외워주는 아이.


로자 아줌마가 두려워했던 건 '병원에서 식물인간 세계 챔피언(294p)'이 되는 것이었다. 로자 아줌마는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어 간다. 간이 안 좋고, 왼쪽 신장도 심하게 안 좋고, 가끔 어린애가 되는 순간이 잦아진다.


모모는 기도문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함께 유태교 기도문을 암송한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침을 뱉는다. 그건 모모의 종교가 아니었으니까.

로자 아줌마는 모세(유태인 아이)에게 유태교 기도문을 가르쳐줬었고, 모모(무슬림 아이)는 그 둘이 기도할 때 자신만 빼놓고 두 사람만 기도하는 게 심통 나서 따라 외웠다. 그래서 아랍인임에도 모모는 유태인 기도문을 알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빡빡 이마를 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 로자 아줌마의 생의 마무리를 돕는 모모.


의사 카츠 선생님이 아줌마를 병원에 보내야겠다고 할 때, 로자 아줌마는 병원에서 생을 마무리하게 될 위기에 처하기 된다. 그때 모모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한다. 이스라엘에 아줌마 친척이 있는데, 아줌마 친척이 아줌마를 데리러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늘 병원에 갈 수 없다,라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카츠 선생님이 그럴듯한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진작 연락을 하지 않았다니?" 아무래도 로자 아줌마는 창부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워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전에는 본인이 엉덩이로 벌어먹는 일을 했었고 말이다.

내가 생각한 답은 "글쎄요. 아줌마가 별로 소중하지 않았었나 보죠?" 라던지, "아줌마가 죽은 줄 알고 있었나 봐요." 정도였는데 모모의 대답은 훨씬 로맨틱했다.


"그분들은 아줌마에게 오라는 편지를 보냈었는데, 아줌마가 나를 버리지 못해서 안 갔대요. 로자 아줌마와 나는 서로 떨어져서는 못 살아요. 우리는 세상에 단둘뿐이잖아요. 아줌마는 나와 헤어지기 싫었던 거예요. 지금도 아줌마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어제도 제가 애원했어요. 로자 아줌마, 이스라엘에 가서 친척들과 함께 사세요. 그러면 편히 돌아가실 수 있어요. 거기 가면 친척들이 돌봐줄 거 아니에요,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거기 가면 대접받을 거예요, 하고 말이에요."

-287p


그리고 이런 임기응변이 잘 통했는지 카츠 선생님은 응급차 부르길 포기하고 돌아간다. 아줌마는 모모의 꾸며낸 이야기를 다 들었다.


"모모야..."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다 들었다."

"알아요. 아줌마가 눈 떴을 때 알았어요."

"그래, 난 이제 이스라엘로 떠나는 거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피차 가슴만 아프니까.

-290p


* 생에 대한 모모의 생각.


나는 식물인간으로 세계기록을 세운 미국인이 예수그리스도보다도 더 심한 고행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십자가에 십칠 년여를 매달려 있었던 셈이니까. 더 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300p


*


자기 앞의 생의 빌드업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모모가 죽음 앞에서 로자아줌마를 배웅해 주는 전개가 굉장히 흡인력 있게 읽힌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로자 아줌마의 휴식처.


로자 아줌마는 층계로 가더니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윽고 그녀는 일층에 도달했다. 하지만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왼쪽으로 돌더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지하실은 불빛은커녕, 낮에도 캄캄한 곳이었다.

...

그때 어디선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지하실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었다. 나는 약간 안심이 되었다.

....

방 한복판에 밑이 푹 꺼지고 다리도 다 망가진, 더럽기 그지없는 붉은색 소파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줌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이제 겁도 나지 않았다.

....

로자 아줌마는 그 낡은 소파에 한참을 앉아있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교활한, 심지어는 정복자 같은 미소였다.

-44,45p


교활한, 심지어는 정복자 같은...이라는 형용사를 빼내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는 아줌마다. 아줌마는 지하실을 자신만의 안식처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 모모의 아버지?


소설 후반 즈음 십 일 년 전, 자신의 아들을 로자 아줌마에게 맡겼고, 죽기 전에 아들 한번 보려고 찾아왔다는 한 남자가 찾아온다. 로자 아줌마는 당신의 아들은 여기, 모세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남자는 유태인 아들이 아니고, 회교도 아들을 맡긴 것이라며, "저는 결코 유태인 아들은 원치 않습니다, 부인. 절대로 그건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정황 상 남자의 아들은 모모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는 피해망상증으로 아내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아이의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최악인 건, 끝까지 온전한 회교도 아들 타령을 하며 "얘는 내 아들이 아니야!"라는 말이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미동도 없다.


모모는 시체를 신분 보장된 프랑스 사람의 집 앞 층계참에 끌어다 둔다. 그래도 곁에 앉아서 그 남자의 주머니에 있는 담배 한 갑을 발견하고, 남아 있는 한 개비를 피운다.


나는 조금 울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도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그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했다. -230p


이 장은 남자의 행태나 꼬락서니가 만담 같고 웃겼다. 근데 뭔가 묘했다. 다시 아버지일 수도 있는 남자의 곁에 가서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계단에서 피우는 모모의 모습이.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누군가가 있었다는 게 모모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모하메드의 나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데, 사실 모하메드는 10살이 아니고 14살의 소년이었다.


*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소설에서는 아름다웠던 15살 무렵의 로자 아줌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과거의 그 모습에서 어떻게 현재의 로자 아줌마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 나온다. 그 외에도 로자 아줌마는 과거 자신이 럭셔리한 곳에서 일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내 처지가 왜 이렇게 되었지, 혹은 나 그랬던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로자 아줌마가 곱게 화장을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가리는 행위다.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137p


시간이 흐른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것이고, 나이가 들면 변하는 게 수두룩 빽빽이다. 건강부터 외모, 무릎 관절, 계단을 오를 수 있는 능력, 할 수 있는 직업, 그 나이 때에 추하지 않게 느껴지는 행동... 다 변한다. 개인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자연스럽다.


그래서일까 자꾸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듯한 로자아줌마의 말을 들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요.'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요.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어요. 구역질 나는 그따위 것은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라는 모모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노인들은 겉으로는 보잘것없이 초라해 보여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 그들도 여러분이나 나와 똑같이 느끼는데 자신들이 더 이상 돈벌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보다 더 민감하게 고통받는다. 그런데 자연은 노인들을 공격한다. 자연은 야비한 악당이라서 그들을 야금야금 파먹어간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노인을 안락사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178, 179p


*


처음 책을 읽을 때 나는 로자아줌마와 모모의 관계가 돈으로 이어져있다고 생각했었다. 로자 아줌마는 양육비를 받아서 아이들을 보육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많은 걸 내포하게 된다. 로자 아줌마가 모모를 돌봐줬었고, 모모가 로자 아줌마의 임종을 지키게 되니까. 정든다고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


그 외에도 좋은 말들이 많았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110p


빌어먹을, 나는 이제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그러다가 또 발작을 일으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하밀 할아버지는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추구해야 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말했다. -104p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일찍부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능력이 떨어지면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게 된다. -101p


*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문장을 적어두겠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94,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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