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Situation - Prep

by 이오십

평생 도망만 다니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야.


오늘도 못한 일을 내일이라고 다르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


나에게는 삼촌이 있다. 삼촌은 어릴 때부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책도 사주고, 놀아주고, 데려다주고... 아무튼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삼촌은 어느 때부터인가,.. 아, 그래. 내가 청소년이 되고 삼촌이 당신의 가정을 꾸림으로써 조금씩 멀어졌다.


다른 분이 하던 가게를 양도받아 시작한 부모님의 사업은 조금씩 안정궤도에 오르고, 조금씩 우리 집에도 볕 들 날이 생겼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충분했다. 충분하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학교를 가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동네 친구들과 컵떡볶이를 사 먹으면 그날 하루를 어떠하다 평가할 필요도 없이 충만한 하루였다. 그런 하루하루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 커서야 알았다.


5평가량의 1층 상가에 세 들어서 부모님은 둘이서 열심히 일하셨다. 일주일에 서너 일은 밤 12시까지 일을 할 정도로 일이 많았다, 그때는. 저녁을 챙겨 먹지 못해서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온 가족이 분식집에서 밥을 해결했고,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날에는 사무실 한편에 딸려있는 작은 방에서 우리 가족 넷이서 옹기종기 잠에 들었다. 노란 장판 위에 초록색 솜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면 아빠가 천장에 달려있는 전등불을 당겨 껐다. 눈을 감아도 빛이 꺼지고 켜지는 건 선명했다. 캄캄한 공간을 들여다보는 일이 무서워서 그땐 꼭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내가 눈 감으면 불 꺼?"

"알았어, 눈 감아봐."


불이 꺼지고 나서도 희미하게 불 꺼진 소리가 남는다. 형광등인지, 백열등인지 전기지식이 전무한지라 왜 이런 식으로 잔상처럼 남아있는 건지, 이게 실제로 나는 소리인지 내게만 들리는 소리인 것인지 궁금했다.

바닥에는 아빠가 손수 깐 난방배선이 있어서 (난 아직도 아빠가 어떻게 이걸 할 줄 아는지 너무 신기하다. 그땐 다 알려주는 유튜브나 인터넷이 활성화되어있지도 않았는데. 하여간 어른들은 뭐든 뚝딱 해내는 게 참 신기했다.) 차가웠던 몸이 뜨끈하게 달궈진다. 슬쩍 눈을 떠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벽시계 초침소리가 들린다.


이게 대략 내가 초등학생에서 중학교로 넘어가기까지의 일이다.


*


그리고 삼촌은, 삼촌만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부모님이 하는 일을 삼촌에게 권유했던 건지, 아니면 삼촌이 부모님께 일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삼촌도 삼촌의 가게를 냈다. 우리 가게의 체인점으로. 삼촌의 가게 매출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종종 우리 사무실에 와서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어린 조카를 놀리는 삼촌이 그래도 꽤 괜찮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몇 년 뒤, 삼촌은 결혼했다.

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우리 외갓집에서는 다 여자밭이라서 남자애가 나온 게 희귀한 일이었다. 이모도 두 딸이 있고, 우리 엄마도 두 딸이 있고, 첫째 삼촌보다 일찍 결혼한 둘째 삼촌은 벌써 세 딸의 아버지였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조금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삼촌은 잘 살 줄 알았다.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고, 가게도 잘 운영하고 있는 것 같고...


*


그리고 몇 년 뒤, 삼촌은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은 재정위기에 처했다. 나는 아직도 왜 그런지 모른다. 당사자가 이야기도 안 했을뿐더러, 어른들끼리만 쉬쉬하며 알고 있던 이야기라 그렇다. 삼촌이 엄마에게 돈을 종종 꿨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엄마 역시 다시 돌려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빌려줬다고 한다. 단, 원금을 갚을 때까지 이자라도 매달 꼬박꼬박 내라는 조건으로 빌려주었단다.


그렇게 삼촌은 원금을 갚았나?


아니다. 엄마는 삼촌이 원금을 통째로 갚는 일은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엄마가 삼촌에게 돈을 빌려주는 조건을 좀 더 상세히 말하자면, '원금에 해당하는 이자만 매달 꼬박꼬박 낼 것.' 이자율은 내 기억으로 시중 금리보다 낮게 책정했다고 알고 있다.

매달 엄마 통장에 삼촌이 보내는 돈이 찍혔을 때 엄마 기분은 어땠을까. 그리고 삼촌은 어땠을까. 결국은 삼촌은 계속 엄마에게 이자에 해당하는 소정의 금액을 꾸준히 보낸 것이다.


그냥 빌려줄 수도 있는 거, 왜 엄마는 이자만이라도 매달 보내라는 조건을 걸었는지 궁금했다.


"조금씩, 그 조금씩이 얼마나 다른지 본인이 알아야 해."


원금을 통째로 갚는 건 삼촌 형편에 당장 불가능할지 몰라도, 소정의 이자를 매달 보내는 건 의지의 영역이다. 약속을 지키고, 작은 성실함이 쌓여서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든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베풀기만 해도 어느 한쪽이 너무 미안해지거나 비굴해질 수 있는데 그것을 막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돈을 빌렸으면, 그 무게를 잊지 말아야 하고, 갚으려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여전히 신뢰할 가치가 있는 거란다."


*


그 이후로 삼촌을 보면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던 삼촌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시스템은 리볼빙이다. 카드 대금의 10%만 납부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룰 수 있는 시스템. 연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결제 비율만 납부하면 연체자가 아니게 된다. 이자율은 높고, 복리로 계산된다...


리볼빙은 그런 것이다. 곧 죽을 것 같아도 절대 발을 들이면 안 되는 시스템이다.


*


리볼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면, 그냥 하루의 일상을 생각하면 된다.


하루의 일상에서 오늘 해야 할 일을 당장 하지 않고 미루면 당장의 체면은 구겨지지 않는다. 다만 다음날이 되면 내가 어제 미룬 것들이 희뿌연 먼지처럼 소복하게 쌓여 당장 오늘 해야 할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해야 할 일이 있다,라는 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목표'가 있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기간' 내에 '해야 할 행동 양식'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또 오늘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잠에 들면, 그 다음날 더 미뤄뒀던 일들이 불어나 있고...

아시다시피 등비수열로 불어난다.


" 100이라는 단위가 있는데, 이것의 10%만 오늘 해결하는 습관이 있다고 치자.

이것의 90%를 뒤로 미루고, 이에 대한 이자율은 연 18%(월 1.5%)라고 가정하겠다."


1개월 뒤 : 100*0.9=90(첫 이월발생)

2개월 뒤 : (90*1.015+100)*0.9=172.2

3개월 뒤 : 247.3

6개월 뒤 : 453.6

1년 뒤 : 782.5


다음 달로 미룬 숙제는 이렇게 크게, 크게 불어나서 차이를 만든다. 미루는 게 무서운 건 처리해야 할 양이 늘어난다가 아니라, 처리해도 티가 안 나는 상태를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 당월 처리양을 계산해 보면


1개월 뒤 : 10

3개월 뒤 : 27.4

6개월 뒤 : 50.4

1년 뒤 : 86.9


그러니까 결국 미룬다는 개념은 미래에 빚지고 산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가 미래에 빚지고 살겠지만, 개인이 개인의 미래에 빚지고 산다는 건 또 다른 의미이지 않나.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한 건 자연스러웠다. 목표의 상실은 언제나 발생하는 바이다. 특히 목표가 타의에 의해서 달성불가한 것이 되었을 때, 참 허무해진다.


*


잠깐 목표가 없어졌을 때,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모두는 각자의 빛을 향해 하루를 충분하다고 느낄 만큼, 그렇게 충실히 살아가는데 나는 왜 배회하고 부유하고 있는 것 같지. 차라리 죽어도 상관없겠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 밖에 없고, 햇빛이 눈부신데 나는 바스러지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목표가 다시 생기는 게 무서웠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본인을 가다듬어가는 그 과정이 두려웠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특히 내가 좋아했던 나의 모습도 깎여나갈 수 있다는 것이 싫었다.


어쩌면 굉장히 인공적인 생각이었다. 세상 일이 다 마음먹는 대로 되나. 목표를 세운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의도한 바대로 진심이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결과가 나오는 건 '의지'로 표상되는 인공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실패하는 게 싫었다. 보장된 미래를 얻고 싶었다.

구르고 깨져도 개똥밭이 아니고 꽃밭에서 구르고 싶었다.


*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조차 없다.

피지 않은 꽃은 아직 꽃이 아니다. 그냥 꽃봉오리다.


*


성공과 운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 늘 의문이 있었다.


*


누구나 성공하고 싶은데 왜 성공할 수 없을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면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의 관문에서 성공하고, 성공하고, 성공하고, 또 성공해서 결국은 큰 성과를 낸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늘 성공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사실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다시 시도할 기회가 있어야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다시 돌아갈 집이 있어야 하고, 당장 생계에 매달리지 않아도 괜찮아야 하고,... 아무튼간에 또다시 실패와 성공 중 성공이라는 패가 나올 때까지 카드를 뒤집어보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많은 카드를 뒤집어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우린 다 알고 있다. 누구는 한 번 뒤집었는데 원하던 카드를 얻고, 누구는 수 십 번을 뒤집어도 원하는 카드가 안 나온다. 아무리 성실하게 뒤집어봐도 결국 사람에게는 제한된 시간이 있다. 시도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한다. 이래서 고등 수학은 참 재미있다. 그땐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이제 와 보니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


삼촌은 술을 참 많이 드신다. 얼굴이 거의 빨간 채로 다닌다. 물론 계속 술만 퍼마시는 건 아니겠지만, 얼굴에 혈관이 확장된 게 돌아오지 않는지 얼굴이 빨갛다.


사촌동생은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모르겠다.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내게 앞에 놓인 처리할 일들을 미루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게 다가올 미래가 더뎌짐을 견뎌내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좀 달랐을까?


그렇진 않다.


모든 계절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순환하는 것에 가깝고, 용수철 형식에 가깝다.


*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미루는 습관이 누적되면 그래프는 수직에 가깝게 치솟아 오른다. 제곱수의 특성이 그렇다.

해야 할 일은 곡선을 조금씩이라도, 조금씩, 우하향하도록 바꿔야 한다.


100을 쓰는 습관을 80으로 줄이고, 남은 20을 미룬 숫자를 갚는 데 보태면 어느 시점부터 이자보다 원금 삭감액이 커지는 임계점에 도달한다.

결국 매달 미루는 90의 양 자체를 부숴버려야 하고, 걸어서 미래로 나가야 한다.


사람의 몸은 탄성체이다.

한계치가 있기 때문에 미루거나 방치해서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루를 잘 가다듬어 가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나도 무언가를 계속하고는 있다. 미루는 것을 줄이고, 줄이고, 줄여보려고.


그러다 보면 가상으로의 회피가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오늘이 달가운 날이 올 것 같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삼촌의 이야기는 2% 정도의 허구가 섞여있다.)


('Revolve'는 **'회전하다', '공전하다', '돌다'**라는 기본 뜻 외에, '무엇을 중심으로 돌다' 또는 **'주된 소재가 되다'**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

돌고 돌고 도는...


(쉬어야 하는 사람들이 미래에 빚지는 게 두려워 본인을 쉬지 못하게 하는 소위 '안달난' 마음의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화, 토 연재
이전 18화네가 날 좀 더 사랑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