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는 아까 회의 때 들어갔던 회의실로 다시 가서 나 대리에게 업무 교육을 받았다. 나 대리는 까탈스러운 면은 있어 보였으나 장 팀장 말대로 배울 점이 많아 보였다. 두 시간가량의 교육이 끝나자 나 대리가 한결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아까 회의 때 팀장님 때문에 당황했죠?”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부정하자 나 대리가 그 마음 안다는 말을 이어갔다.
“팀장님은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아요. 인사팀장이니 당연한가 싶기도 하지만, 그 관심이 뭐랄까… 어떨 때는 좀 집요한 데가 있어요. 특히 본인 팀원들에게는 더.”
“아 예, 벌써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오늘 교육 때 말해 준 인사규정, 취업규칙 뭐 이런 것도 중요하긴 한데 두릅씨가 앞으로 진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신입사원으로서의 태도예요. 알아요. 이런 말 자체가 꼰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는 거. 근데 여기는 공단이고, 폐쇄적이고, 사람들 흥밋거리가 다른 사람 얘기밖에 없어요. 그만큼 말이 빨라요.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그게 어떻게 돌아올지 몰라요. 나도 경험으로 배운 거니 명심해요.”
갑작스러운 조언에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나대리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내가 신입사원일 때, 다른 팀 동기랑 사내 연애를 했어요. 뭐, 그 사람은 지금 퇴사했지만. 어쨌든 그땐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게 뭐 숨겨지나요.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든 티가 났겠죠.”
“그런데요? 그게 무슨 잘못인가요…?”
“잘못? 잘못은 당연히 아니죠. 근데 그때부터 없었던 일도 진짜가 됐어요. 둘이 같은 옷을 입고 출근했다더라부터 아침에 모텔 골목에서 나오는 걸 봤다느니. 참, 진짜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한참 뒤에 개발팀 직원이랑 친해졌는데 그 직원이 술자리에서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운전하고 가는 길에 둘이 같이 버스 타는 걸 보고 자기가 그 버스를 따라갔다고.”
“왜요?”
“왜긴, 연애한다는 증거 잡으려고요. 갤러리에 있는 그때 사진까지 보여주더라니까요? 본인 딴에는 웃긴 얘기라고 낄낄대며 말하는데 얼마나 소름이던지.”
“진짜요?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요.”
“뭐, 이제 다 지나간 일이니 괜찮아요. 어쨌든 이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 심심하고 지루한 공단에서 가십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으면 항상 조심해요. 여긴 언제나 가십이 필요한 곳이니까. 게다가 두릅씨는 오랜만에 온 신입사원이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딱 좋아요. 너무 말이 구구절절이었네.”
“아닙니다. 대리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조심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요. 아까 팀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늘 대표이사님 식사이니, 체하지 말고요.”
나 대리가 싱긋 웃으며 회의실 문을 나섰다.
범주공단에서 외식을 한다고 하면 메뉴가 크게 2가지 중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공단 초입에 있는 ‘중화요리 상하이’라는 오래된 중국집 또는 그 옆에 있는 ‘공단 찌개 라면 무한리필’라는 돼지고기 김치찌개집이었다. (라면 무한리필까지가 상호명이다.) 그 외에 한식뷔페를 포함한 몇몇 식당들이 더 있었지만 피크타임에 북적이는 곳은 저 두 곳뿐이었다. 대부분의 공장에는 구내식당이 있기 때문에, 심심한 구내식당 식사에 질린 이들의 눈길을 끌려면 자극적이고 포만감을 많이 주는 메뉴들이 유리했다.
“네, 예약 좀 하려고요. 오늘 12시 6명이요. 탕수육 대자 하나만 2개로 나눠서 미리 만들어 놔 주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한진주 씨가 상하이 식당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이 되고 팀원들과 함께 걸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한진주 씨랑 나란히 걷게 되어서 그때 처음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강원도에 위치한 한 전문대학 항공과를 다녔던 그녀는 입학할 때는 승무원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승무원 유니폼, 그중에서도 목에 두른 빳빳한 깃의 스카프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며 잠깐이지만 눈을 빛냈다.
하지만 대학의 낭만을 품고 입학한 이 신입생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은 스카프보다 훨씬 더 빳빳했다. 그녀가 늘 맞춰야 하는 것은 중간고사의 정답이 아니라 선배들의 비위였다. 그들은 항공과의 품위라는 명목 하에 숱한 불합리를 요구했다. 교내를 다닐 때는 항상 스프레이칠을 한 올림머리에 풀 메이크업을 요구받았다. 수십 명이 모여있는 단체카톡방에서 선배가 안내사항을 전달할 때는 메시지를 확인한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답장을 해야 하는데, 마지막에 답장을 한 사람은 선배들에게 호출을 당해 핸드폰을 늦게 확인한 이유에 대해 추궁을 당했다. 교내에서 이어폰을 끼고 다닌 행동을 품위 훼손이라며 ‘항공과의 수치’라는 말로 지적을 받았을 때 진주 씨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고 했다. 그 길로 항공과를 휴학하고 편입을 준비해 타학교 사무경영학과로 들어가 지금 비서 자리까지 오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진주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금방 상하이에 도착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탕수육이 한 줄로 이어진 2개의 테이블에 각각 놓여 있었다. 장 팀장이 대표이사님이 금방 오실 거라며 자리를 세팅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작은 체구의 중년 남성이 가게로 들어왔다. 팀원들이 그를 보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 때 만났던 대표이사와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들은 직원들의 말마따나 최근에 새로 부임한 게 맞나 보다.
내가 인사할 타이밍을 찾으려 우물쭈물하자 그가 날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신입사원이죠?”
“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네, 반가워요. 앉아요.”
대표이사가 먼저 착석하자 나머지 팀원들도 모두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작은 체구에 목소리가 우렁차고 행동이 시원시원해 호쾌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사원복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오른쪽 가슴에 달린 명찰에 ‘CEO 최준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업원이 미리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나오자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여기 상하이 맥주 한 병만 줘요. 제일 맛있는 걸로 골라서.”
낮부터 알코올이라니 이게 공장의 현실인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행히도 벙찐 얼굴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이야. 식당 가서 술 주문할 때 항상 제일 맛있는 걸로 달라고 해. 다 똑같은 기성품 같지?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제일 깔끔한 걸로 골라서 가져오거든.”
“예, 대표님. 맞는 말씀이십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그런데 3시 TF 회의가 있으신데 술 괜찮으시겠습니까?”
“맥주 한잔인데, 뭐. 축하주야, 축하주. 장팀장도 가만 보면 참 정 없어. 사람이 새로 왔는데 축하주 한 잔은 들어야지. 안 그런가?”
대표이사가 갑자기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달리 선택지가 없어 애매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자 대표이사가 흡족한 웃음을 띠었다. 주문한 병맥주가 나오자 그는 거침없이 병따개를 집어 뚜껑을 땄다. 그 모습을 보고 장 팀장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맥주잔을 갖다 댔다. 그를 시작으로 대표이사가 돌아가며 다른 이들의 잔을 채우고, 마지막 남은 본인의 잔은 내가 채우도록 눈치를 줬다.
“자, 우리 신입사원! 우리 젊은 피! 잔 한번 받아보고 건배사나 들어보지.”
아… 진짜 인생에 미션이 너무 많다.
이런 상황을 능글맞게 타개하는 성격을 타고났으면 좋았으련만. 장팀장이 얼른 일어나라는 손짓을 보냈다.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회사 들어오면 이런 순간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었지만, 입사 첫날, 그것도 벌건 대낮은 결코 아니었다. 입사 전 검색사이트에 ‘신입사원 건배사’를 찾아봤던 기억을 재빨리 들춰봤다. 마땅한 게 없었어도 어쩔 수 없다. 뭘 골라도 내 고유 창작물보단 나을 것이다.
“아… 일단 저를 뽑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고 또 금방 적응하는 사원이 되겠습니다. 그럼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 ‘오냐!’라고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 우리 신입사원 재미가 없네, 재미가!”
뻘쭘한 표정으로 일어나 있는 나를 향해 대표이사가 장난스럽게 얼굴을 구기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잠깐의 침묵이 흐르자 대표이사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재미없는 건배사는 철회하기로 하고 나랑 러브샷 한번 해!”
“예?”
아, 건배사는 미션도 아니었구나.
정신이 혼미하여 장팀장을 쳐다보자 그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다른 팀원들은 처음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떨궜다. 그 사이 대표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팔을 억지로 자신의 팔과 엮은 뒤 채워진 잔을 단숨에 털어냈다. 내 잔이 비워지는 걸 보고 나서야 그는 입사를 환영한다며 잇몸이 보이도록 웃었다. 정말 길고 긴 점심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