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 근로자 박두릅 이야기 9

by 박두릅

내가 들어간 회사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업용 특수 카메라 부품을 대기업의 하청기업에 납품하는 회사로, 그야말로 ‘하청의 하청’이었다. 분야의 특수성 때문에 비록 수요는 적었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매출 덕에 당시 대표이사는 본사 회장님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어찌어찌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던 중 일 욕심 있던 대표이사가 스마트폰의 태동기에 힘입어 도약할 준비를 했고 운 좋게 글로벌 IT 기업의 협력사 입찰에 성공했다. 그때부터 회사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24시간 내내 공장이 돌았다. 매주 신규 직원들이 입사하면서 회사가 북적였고 활기를 띄었다. 매년 초에는 연봉보다 많은 금액의 성과급이 직원들의 통장에 찍혔다. 매출 1조 클럽에 들어가네 마네하며 들뜨는 감정은 비단 대표이사의 것만은 아니었다.


이런 아름다운 시절이 영원했으면 좋으련만,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급률이 한도에 가까워지고 교체주기가 길어지면서 매출은 무섭게 꺾이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지루할 정도로 길기도 하던데 내리막은 순식간이었다. 회사에 흉흉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표이사 해임 발령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왔다. 그를 신호탄으로 인사팀에서는 직원들을 한 명씩 회의실로 불렀다. 정리해고 수순이었다.


이정순 반장님은 담담한 말투로 파서블렌즈의 흥망성쇠를 얘기했다. 그녀는 회사가 직원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가 끝을 모르고 성장하니 묵직한 소속감 같은 것이 모르는 새 스며들었다고 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고 그게 다시 동기가 되어 동료들과 응집할 수 있었다고.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회사가 끝을 모르고 추락할 때 직원들은 재빨리 털어내 버려야 하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함께 일하던 동료 수백 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어도 텅 빈 라인에서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해야 했다. 사라진 동료들 중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신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지기도 했다. 죄책감을 잊기 위한 발버둥이었는지 그때부터 더 열심히 모듈을 조립하고 센서를 확인했다. 남은 직원들이 괜스레 애틋해져 직원 한 명 한 명의 삶을 더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반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회사로 옮길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창립기념일 선물 신청서를 전달하러 내려왔다가 만난 이 반장님과 캔커피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회사? 적을 옮길 때는 이유가 명확해야지. 지금 환경이 못 참을 정도로 불행해서 이러다 죽겠다 싶든가, 아니면 옮기려는 곳에 낙원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을 것 같다던가. 그게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게 돼. 회사는 사실 어디든 비슷하니까. 멀리서 보면 고만고만한 일들, 비슷한 갑을 관계, 어디나 있는 적당히 좋은 사람과 이상한 사람들. 나는 뭐, 동료들 그렇게 되고 나서 허전하기는 했지만 불행한 것까지는 아니었어. 그리고 내가 옮기면 이 동네, 이 공단에 있는 다른 공장이나 가겠지. 그 공장도 어려워지면 비슷한 수순을 밟을 테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역시 반장님은 어른이시네요. 저는 벌써부터 이직 생각이 들어요.”


“이제 한 달 됐는데, 벌써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떡해? 하긴, 거기 사람들이 좀 쉽지 않지?”


“제 멘탈이 너무 약한가 봐요.”


“아냐, 장팀장도 그렇고, 라정이도 사실 아랫사람들한테 편한 스타일은 아니지.”


“임 선배랑은 유독 가까워 보이시던데요.”


“라정이는 원래 라인에서 일하던 직원이었어. 애가 대학교는 중퇴해서 최종학력은 고졸이 됐지만, 어쨌든 대학 진학한 경험이 있고 또 워낙 밝으니까. 인사팀 커질 때 생산직 직원들이랑 소통할 만한 인원도 1명 있으면 좋겠다 해서 운 좋게 사무직으로 전환된 거지. 걔가 겉으로는 막 그래 보여도 마음은 여려.”


“여린지는 사실 모르겠어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휴가인 임 선배의 백업차 그녀의 회사 이메일 계정을 전달받았었다. 새 메일이 들어와서 보니 우리가 통근버스로 이용하는 뉴타운 관광버스 담당자였다.



새 메일함 1건 :: [RE] [RE] 노선도 업데이트 관련 건

예, 그러면 앞으로의 신규자에게는 현재 최신본으로 정상 배포되는 것으로 참고하겠습니다.


노선도가 바뀌었나 싶어 스크롤을 내려 이전 메일을 읽어봤다.

메일 하단에 임 선배가 보낸 메일이 남아 있었다.


[RE] 노선도 업데이트 관련 건

어머, 대리님! 바쁘신데 죄송해요.

저희 팀에 새로 온 신입사원이 있어 제가 얘기했었는데, 전달이 잘 안 됐나 봐요.

저희 애가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 이번만 이해해 주세요.

앞으로 제가 직접 챙길게요.

감사합니다.

임라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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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t: 노선도 업데이트 관련 건

임라정 사원님, 안녕하세요. 뉴타운 관광버스 노선 담당자 이호준 대리입니다.

죄송하지만 문제 있었던 사진을 수정하여 지난 5월에 업데이트 노선도를 전달드렸는데 아직 신입사원들에게 제대로 배포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규 입사자가 있을 때마다 불편을 겪고 있어 조속히 업데이트 본으로 안내, 배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입사 첫날, 나도 통근버스 탑승 장소를 헷갈렸던 것처럼 노선도에 잘못된 사진이 몇몇 있었고, 버스를 직접 이용하는 직원들의 제보를 받아 버스 회사 담당자가 이를 수정해서 임 선배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리고 메일이 말해주듯, 임 선배는 약 두 달간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고 그 일을 뭉갰다. 그리고 재촉이 오자 내 잘못으로 교묘히 바꿔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물론 나에게는 일절 전달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 선배가 여리다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곤란한 상황을 탈피해야 할 때 어떻게 하는지, 그때의 선택은 그 사람의 본성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걔가, 걔 위치가, 생각해 봐라. 나 대리는 본인보다 훨씬 늦게 입사했는데 대졸이라고 먼저 대리 달았지. 장팀장은 알잖아? 학력 최우선 주의. 알게 모르게 라정이를 얼마나 무시할 거야. 어떤 때는 진주씨를 더 대접해 준다니까. 대표이사 비서라고. 그러니 좀 힘들게 해도 가끔은 그냥 이해해 줘.”


“네, 노력해 볼게요, 반장님… 가끔은 그냥 다 내려놓고 퇴사 먼저 지르고 싶어요.”


“농담이라도 절대 그렇게 하지는 마. 2년은 버텨.”


“너무 긴데요…?”


“지금은 까마득해 보이겠지만 사이클이 익숙해지고 나면 그 뒤에는 그냥 시간이 가는 거야. 지금은 적응기이니 당신이 보낼 2년 중에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경력을 손에 쥐고 나가야 그 경력이 취업시장에서 두릅씨를 보호해 줄 수 있어. 하다못해 허드렛일 경력이더라도 2년을 가지고 있으면, 얘가 그동안 사회생활 맷집은 키웠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사람 마음이야.”


“네, 반장님. 2년… 꼭 버텨보겠습니다. 제가 반장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들어가 봐야겠다.”


이 반장은 빈 캔을 들고일어나며 채비를 했다. 떠나려는데 반장님이 나를 다시 불렀다.


“두릅씨 근데, 혹시라도 벼랑 끝에 몰렸다는 확신이 들면 그때는 뒤돌아보지 말고 떠나. 도망친 곳에 낙원까지는 없어도 숨 쉴 곳은 있을 테니까. 사람이 숨은 쉬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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