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배송 착오

by 영두리

매년 근무하는 직장(거기서의 직급은 ‘아저씨’가 아니다)에서 부여한 연차 중 하루는 연말이 될 때까지 반드시 남겨놓아야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었을 때, 오롯이 하루를 소모해서 케이크 배달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무 개 남짓 되는 단체물량을 선주문하는 고마운 단골 거래처, 주변 은행과 학원, 제약회사 등에 케이크를 싣고 가서 성탄인사와 함께 전달한다. 한 번에 모두 들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승용차 트렁크 용량이 크지 않다 보니 여러 군데를 오며가며 배달한다.


15년 넘게 크리스마스 케이크 배송을 요청하는 근처 치과 원장님이 계신다. 치과 중에서도 보철 제작에 특화되어서 주변의 다른 치과의 보철 의뢰 건도 함께 진행하는데, 매년 연말이면 같은 지역의 고객 치과들에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홍보용 카드 전달을 요청하신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올해 케이크 상품 라인업이 담긴 인쇄물을 들고 찾아 뵙고, 며칠 지나면 케이크를 배송할 치과 목록을 가져오신다. 그 목록에는 스무 군데 남짓 주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치과 상호와 주소와 케이크 종류들이 적혀 있다. 시간 많이 걸릴 텐데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신다. 우리는 매년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로 화답한다.

배송 당일이 되면 써니는 내 보조 역할을 할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붙여준다. 치과 목록을 쭈욱 훑어보면서, GIS 분야 전문가로서 쌓아온 공간정보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최적의 동선 계획을 수립한다. 동선에 맞춰 치과를 차례대로 방문해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배송한다. 대략 2~3시간 남짓 걸리는 연중 행사로, 이 치과 투어를 치러야만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된 느낌이 든다. 운전대를 잡고 배송을 완료한 치과들의 상호를 하나씩 지워나갈 때면, 나는 마치 누군가의 마음을 운반하는 전령이 된 기분이 든다. 그럴 때면 언젠가 책에서 보고 메모해 두었던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일화가 떠오른다.


라보엠, 서부의 아가씨, 투란도트 등 푸치니가 작곡한 수많은 명곡들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를 통해 초연 무대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작품활동만 두고 보면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한 사람은 뛰어난 작곡을 하고 다른 사람은 멋지게 무대 연출을 하는 찰떡 궁합의 파트너로 여겨지지만, 그들의 일화를 보면 마치 절교와 화해를 손바닥 뒤집기 하듯 하는 변덕 심한 애증의 관계였던 것 같다.


이탈리아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친한 지인들에게 파네토네(Panettone)라는 케이크를 선물하는 ‘매우 바람직한’ 전통이 있다고 한다.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서로 극단적인 정치적 스펙트럼을 보이며 자주 대립했고,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가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나 보다.


푸치니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토스카니니에게 이미 발송된 것을 뒤늦게 알아챘고, 서둘러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냈단다.

“케이크가 실수로 잘못 배송되었음 – 푸치니”

그러자, 토스카니니에게서 답장의 전보가 왔다고 한다.

“케이크를 모르고 실수로 먹어버렸음 – 토스카니니”


두 거장의 달달한 에피소드가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케이크는 때로 백 마디의 사과보다 달콤한 화해의 전령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내가 오늘 하루 연차까지 내어가며 배송한 이 케이크들도 누군가에겐 그런 전보가 되었을까. 치과 대기실에 놓인 이 달콤한 상자가 직장생활의 피로를 녹이고, 서먹했던 동료 사이를 잇고, 케이크를 보낸 치과 원장님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는 징검다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케이크는 화해다.

케이크는 우정이다.

케이크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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