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큐브 한 판 어때요

by 영두리

한 자리에서 20년 가까이 영업하는 매장이다 보니, 주말과 주일에 ‘아저씨’ 신분으로 매장 한켠에 앉아서 관찰하다 보면 단골 손님들의 방문이 대충 예상된다.


주말 점심 무렵에는 근처 실내수영장에 자녀들을 보낸 후 일상 담소를 나누는 엄마들 모임이 있었는데 요즘 한동안은 뜸하다. 오후가 되면 쌍둥이 남매와 함께 젊은 부부가 찾아와서 잠깐의 여유를 즐긴다. 남매가 사이좋게 타던 2인승 유모차는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슬슬 매장을 휘젓고 다닐 태세로, 써니는 친해지려고 매번 노력 중인데 녀석들은 아직 꽤 도도하다. 거의 매일 출근 도장 찍다시피 방문하는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손님은 출입구 근처 자리를 선호한다. 다른 자리에 앉았다가도 그 자리가 비게 되면 바로 자리를 옮겨 앉아 그리고 지우고 검색하기를 반복한다. 연세 지긋한 선생님께서는 맨 안쪽 자리가 고정석이다. 자리에 가방을 두고 카운터에서 차를 주문하고 작은서가에서 책을 고르고 독서대를 챙겨서 다시 자리로 향한다.


주일에 홀에서 함께 하는 멤버는 약간 다르다. 매장 근처 교회 성가대일 것으로 추측되는 분들이 점심 무렵에 늘 찾아주신다. 대화의 톤이나 발성으로 봐서 분명 소프라노 파트이실 것 같다. 오후로 접어들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과 함께 오는 아빠가 방문한다.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하고 각자 책을 꺼내놓고 한참 동안 독서를 즐긴다. 초·중학생 때부터 단골이었던 아빠, 엄마, 아들, 딸 네 가족을 한동안 못 봐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오랜만에 훌쩍 커버린 애들을 앞세우고 들렀다. 그리고, 여준이네 가족이 온다. 늘 여준이가 먼저 매장에 들어온다. 엄마는 두 번째다. 차를 주차하고 오는 아빠가 늘 꼴찌다. 아빠 손에는 오늘도 변함없이 루미큐브 박스가 들려 있다.


혹시 시간 괜찮아요? 루미큐브 한 판 어때요?


특별히 바쁠 것도 없으니 언제든 오케이다. 테이블에 둘러앉고 익숙하게 루미큐브 게임판을 세팅한다. 타일 받침대를 각각 세우고, 최초 타일을 14개씩 나눠 갖는다. 음료를 마셔가면서, 조각 케이크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쉴 새 없이 타일을 내려놓고 조합한다. 여준이의 표정으로 볼 때 수중에 조커를 하나 이상 들고 있는 게 느껴진다. 앞 사람이 타일의 배열을 뒤섞어 놓을 때마다 여준이 표정이 변하는 게 티난다. 그러더니 자기 차례가 되어서 후루루룩 타일을 조합하여 털어내고 승리를 선언한다. 정말 많이 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루미큐브를 알려 주었을 때는 조커를 가지고 시작하지 못하면 떼쓰고 지루해하면서 본인 빼고 하라며 투정 부리기 일쑤였다. 여준이랑 같이 즐길 목적으로 시작한 보드게임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여준이만 쏙 빼놓고 어른 셋이 자기들끼리만 즐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셋이서 즐기다가 시들해졌었는데, 최근에 다시 재미들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넷이서 함께...


새학기가 시작되면 초등학교 6학년이 된단다. 열 살이 되었다고 축하해 주었던 게 얼마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새 또 세월이 흘렀나 보다. 키가 훌쩍 자라서 이제는 엄마 키와 엇비슷해졌다. 여전히 뽀얀 피부, 찰랑대는 머리 스타일, 어리광 섞인 말투이긴 한데, 조만간 아빠처럼 수염이 나고 목소리 굵어질 날이 머잖은 것 같다. 써니 이모가 양팔 벌려 안으려고 할 때마다 덜컥 안기던 녀석이 남사스럽다는 표정으로 거부할 날도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


여준이에게 써니는 ‘써니 이모’라고, 나는 ‘영두리 삼촌’이라고 불린다. 이모와 삼촌이 부부로 함께 사는 이상한 관계인 셈인데, 여준이가 말을 배우던 때에 잘못 각인시킨 탓이다. 여준이네는 친인척은 아니고 단골손님과 매장 주인 관계다. 여준이 엄마가 여준이 엄마가 되기 훨씬 전부터 단골손님이었다. 매장에 혼자 와서 책을 보고 비즈 작업을 하다가 가곤 했다. 그러다가 남자 친구인 오빠와 함께 찾아왔다. 미술 쪽을 하는 선후배 관계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하며 알콩달콩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은 훈훈한 커플이었다. 오빠가 남편이 되고 이윽고 아빠가 되었다. 신혼살림은 우리 매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아파트 단지에 차려졌는데, 세 식구는 참새 방앗간마냥 수시로 들렀다. 태교음악에도 입덧음식에도 우리 매장 지분이 적잖이 있을 것 같다. 가끔은 써니가 여준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 육아에 지친 두 사람이 잠깐이나마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였다. 가끔은 엄마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르고 빌리는 동안 여준이 혼자서 매장에 머물 때도 있었다. 써니 이모가 챙겨준 딸기와 우유를 먹으며 얌전히 엄마를 기다리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아빠는 공교롭게도 나와 생일이 같았다. 매장 오픈 역시 내 생일에 맞춰서 했으니, 우리 셋의 생일은 매년 똑같다. 둘은 만나면 직장 이야기를 나눴다.


여준이가 초등학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보드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서른 살 갓 지난 무렵에 한창 보드게임에 빠졌던 추억을 이야기해줬다. ‘보드게임 한 판 어때’라는 단행본도 집필했었더라고 소싯적 기억을 꺼내들었다. 내가 아는 선에서 어울릴만한 보드게임을 하나하나 소개해줬고, 여러 보드게임을 구매하고 열심히 룰북을 읽어가며 어울렸다. 4명이 하기에는 다소 심심하지만 우리 가족 최애 게임인 달무티를 소개해서 한참 즐겼고, 할리갈리는 금방 싫증을 냈던 것 같고, 우노나 젝스님트 같은 카드게임에 여준이가 소질을 보여서 꽤 오랫동안 즐겼으며, 슬슬 난이도를 높여서 블로커스, 카탄의 정착자, 클루 등으로 발전하더니, 최종 정착지가 루미큐브가 되었다.


네 개의 색상, 1에서 13까지의 숫자가 테이블 위에서 서로 다른 색 같은 숫자로, 같은 색의 연속 숫자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가 상황에 따라 서로 떨어지기도 하고 다른 그룹으로 갈아타기도 하면서 관계가 복잡해진다. 새로 바닥에 내린 타일은 규칙을 깨지 않는 선에서 기존 무리에 끼어든다.

루미큐브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단단하게 뭉쳐있던 숫자 무리를 과감히 해체해, 내가 가진 마지막 타일을 그 사이에 끼워 넣을 때일 거다. 루미큐브를 하다 보면 종종 세상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느슨하기도 하고 일시적인 것 같은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인간관계 같기도 하다. 정반합을 되풀이하면서 커지는 생명체 같기도 하다.


우리의 인연도 그랬으면 좋겠다. 단골손님과 매장 주인으로 만난 후 15년 남짓 세월에 가족 이상의 관계가 된 느낌이다. 손님과 주인이라는 정해진 숫자의 틀을 깨고, 서로의 삶이라는 타일 더미 속에 기꺼이 섞여 들어간 덕분에 우리는 '이모와 삼촌'이라는 새로운 조합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여준이가 조커를 손에 쥐고 의기양양하게 웃을 때마다, 나는 그 아이의 웃음 뒤로 훌쩍 지나가 버린 세월의 나이테를 본다. 유모차를 타고 오던 아기가 어느덧 루미큐브로 삼촌을 이겨 먹는 소년이 되었지만, 타일을 섞는 우리들의 손길만큼은 15년 전 그날처럼 여전히 정겹다. 머지않아 여준이가 변성기 겪는 목소리로 "삼촌, 한 판 더요!"라고 외칠 그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변함없이 낡은 루미큐브 박스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임판 위에서, 이렇게 오래도록 곁을 지키며 함께 타일을 맞춰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20년째 이 자리를 지키는 가장 달콤한 보너스 점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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