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닷새간의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포함한 이틀에,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사흘의 설 연휴가 더해졌다. 원래도 짧은 2월인데 더 짧아진 느낌이다.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달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근무일은 다른 달보다 적으면서도 월급수령액은 그대로이니 가성비가 참 좋은 달이다.
어제까지는 여느 직장인과 같은 일정을 치렀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목요일 지방 출장 때문에 미루고 쌓아 두었던 업무들을 하나하나 해치웠다. 어제 출장지에서 고객과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여 회의록을 마련하여 발송하고, 출장 이동 및 회의 중에 건성으로 읽고 지나쳤던 메일과 첨부파일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훑어보고, 회사 게시판 게시물 중 내게 해당하는 사항들을 골라서 읽고, 그룹 내 PM들로부터 주간보고를 받아 점검하고, 본부장에게 그룹 주간 상황을 종합해서 보고하며 평소 금요일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룹장으로 해야 할 역할을 하는 것과 함께 모 기관의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 PM을 맡아 수행 중이다. 이 말인즉슨 그룹 내 네댓 개의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관리 감독하면서 동시에 내 프로젝트를 별도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수행예산 규모가 크고 사업기간은 짧고 사업분야가 다양하고 컨소시엄으로 구성된 회사가 많은, 회사로서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도전적인 용역사업이고, 그 프로젝트의 수장을 맡아 작년 초겨울부터 올해 늦봄 준공을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눈에 띄는 일정 지연이나 큰 위험 혹은 이슈 없이 착실히 진행하고 있었는데, 5부 능선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 진척도가 자꾸 신경 쓰인다. 그런 와중에 보란 듯이 탁 끼어 있는 긴 연휴가 썩 달갑지만은 않다.
긴 연휴가 양가감정을 갖게 한다. 한편으로는 며칠 간의 휴식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따른다. 마냥 반겨 맞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걱정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이 뜨거운 기름판 위 호떡 뒤집듯 이랬다저랬다 한다.
시스템 개발 파트의 리더를 맡고 있는 조부장과 일정을 논의한다. 앞으로 잔여기간이 많지 않은데 진행 일정에 무리가 따르지는 않는지, 이십 대 MZ세대인 막내 담당사원이 연휴 끝 목요일과 금요일에 연차를 써서 9일 연휴을 보내고 와도 되냐고 조심히 묻는데 진도에 영향 없을지... 연휴를 앞둔 내 속내를 꺼내 보인다. 조부장은 어느덧 나와 이십 년째 손발을 맞추고 있는 인생 파트너다. 내가 아무리 에둘러 말한다 쳐도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빠르게 알아챈다. 당연히 걱정되는 게 맞는 상황이지만 쉴 때는 편히 쉬자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답을 조부장 입을 통해 들었다. ‘오늘 못다 한 일은 내일의 내가 열심히 할 것’이라며 쉼 없는 질주보다는 잠시 충전을 선택했다.
주말이 되었고 ‘아저씨’ 신분으로 복귀했다. 설 당일 휴무를 제외하더라도 오늘부터 연휴 닷새 중 나흘 동안은 아저씨 신분에 충실해야 한다. 매장 내에서는 마땅히 노동이랄 것 없는 ‘한직’ 그 자체로, 그저 매장에 나와서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소임을 다한다고 여긴다. 써니의 전화 대신 받아주기(주방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케이크 배송 트럭이 주차할 공간을 미리 확보하기(주말 매장 앞 도로는 주차단속이 없는데 최소한 배송 트럭이 도착할 시간에는 하역작업을 할 공간이 필요하다), 홀 내 적정 온도를 체크하고 냉난방기 조절하기(지긋지긋한 추위가 끝나려는지 기온이 확 올랐다), 단골손님 가족과 눈 마주치고 놀아주기(쌍둥이네 네 식구가 어김없이 들렀다), 테이블 치우고 의자 열 맞추기(홀 안 물건의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은 내 담당이다), 오늘의 에스프레소 상태 품평하기(내가 가장 좋아하는 업무다!) 등을 수행한다.
연휴 시작이라서 지점별 주문 물량이 좀 많았는지 케이크 배송 출발이 좀 늦었다며, 이제 근처 지점에서 출발하니까 곧 도착할 거라는 연락이 왔다. 매장 앞 도로에 나가서, 옆 식당의 음식 포장을 기다리는 배달기사분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트럭 정차 공간을 마련한다. 새벽부터 열심히 만들었을 케이크들이 냉장탑차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매장 주방으로 나른다. 작년에 딱 한 번, 20년 가까이 이 일을 도우면서 처음으로, 케이크 박스를 나르다가 행인과 부딪혀서 케이크 두 개를 망친 적이 있다. 산딸기무스케이크가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떨어져서 박스 안에서 죽 모양이 되어 버렸고, 같이 미끄러졌던 사각산딸기가나슈는 그나마 재활이 가능할 수준의 부상을 입었다. 그 후로는 케이크 박스를 나를 때마다 그 일이 떠올라 신중에 신중을 더하게 된다.
저녁 무렵에는 연휴에 작업하려고 벼르던 일이 있어서 옆 동네 철물점에 들른다. 매장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가 얼마 전부터 제대로 잠기지 않고 물이 새기 시작했는데, 마치 동절기 동파 방지를 위해 물을 약간씩 흘려보내는 조치인 것처럼 보여서 의도치 않게 방치해 두고 있었다. 철물점 사장님께 정확한 제품 설명을 위해서 화장실 세면대 사진을 보여드린다. ‘아, 원홀세면수전을 사시려구요?’ 구멍이 하나짜리인, 세면대에 쓰는, 전문용어로 ‘수전’이라는 제품인가 보다. 비닐봉지에 넣어주면서 혹시 누가 작업할 건지 묻는다. 내가 직접 할 거라는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제품명을 정확히 모를 뿐이지, 매장 주방 싱크대 작업도 여러 번 손수 진행한 나름 경력직인데 그렇게 안 보이나 보다.
마감시간이 대략 1시간 가량 남았는데 아직 홀 테이블에 음료 손님들이 있다. 손님들이 없으면 공사(전문가들에게는 일상적인 작업이겠지만 나에게는 큰 공사)를 시작하려고 상황을 예의 주시 중이나 지금 분위기로는 홀 마감시간까지 계속 있을 듯하다. 분위기를 읽어가며 홀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이 글을 채우고 있다. 아무래도 공사는 매장 마감을 하고, 아르바이트생도 퇴근하라고 보낸 후, 차분히 진행해야 할 듯싶다.
어젯밤 써니와 TV 드라마를 보다가 여행 이야기로 흘렀다. 돌이켜보니 작년 한 해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갔었다. 완주 고택에서 숙박하는 1박 2일 여행,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경주-포항 1박 2일 여행을 간 게 전부였다. 작년에는 역대급 긴 연휴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매장에 나와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서 연휴 기간이 우리에게는 특별근무기간처럼 되기도 했다. 매장을 열기는 하지만 손님은 한산한 수준으로 동네 지킴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농담 삼아 연휴는 왜 이렇게 길며, 대체휴일은 대체 왜 정하는 거냐며 말하고 서로 웃기도 했다.
올해는 어떻게든 여행다운 여행을 한번 가야겠다. 연휴에는 움직일 수 없고, 결국에는 연차를 소진하면서 일정을 세워야 하겠지만, 20년 달린 우리에게도 충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4월 어때? 결혼기념일도 있고 내 생일도 있고. 그때쯤이면 사나흘 정도는 애들한테 매장 맡겨둬도 될 것 같은데. 4월에 방문하기 좋은 곳이 어딜까? 대만? 푸꾸옥? 아까 TV에서 본 가마쿠라? 아, 그냥 국내 제주도라도 2박3일 정도 떠나면 좋겠다’는 써니의 말을 새겨듣는다.
이제 곧 손님들이 나가고 나면, 나는 꽉 잠기지 않아 눈물처럼 물을 흘리고 있는 낡은 수전을 새것으로 갈아 끼울 것이다. 20년을 쉼 없이 달려온 우리 부부의 삶도 어쩌면 저 수전처럼 조금은 헐거워져 있는 게 아닐까.
'내일의 내가 열심히 할 것'이라는 조부장의 호기로운 위로를 빌려와 본다. 이번 연휴, 매장의 '아저씨' 역할과 화장실의 '설비기사' 역할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면, 4월의 달력 위에는 꼭 파란 바다의 색깔을 칠해두어야겠다. 긴 연휴의 끝에 우리가 마주할 것은 쌓여있는 업무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섰기에 비로소 보이는 여행의 설렘이었으면 좋겠다. 연휴의 첫날 밤, 물 새는 소리 대신 4월의 파도 소리를 꿈꾸며 몽키스패너를 꺼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