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갓 마친 준영이가 매장에 들렀다 갔다고 한다. 떡국떡 한 박스와 고급 디퓨저 선물세트를 써니에게 주고 갔단다. 하필 그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고생했다고, 대학 입학 축하한다고, 얼굴을 보면서 인사를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내심 아쉽다.
올해 스무 살이 되는 청년, 우리 매장과 같은 나이로 어느덧 성년이 되었다. 다른 애들이 오랜만에 오면 올해 몇 학년 되는지 몇 살 되는지 가끔 묻는데, 이 녀석은 그걸 물어볼 일 없이 나이 계산이 편하다. 매장 개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새 방앗간처럼 수시로 들르던 새댁 한 분이 돌잔치용 스페셜 케이크와 함께 테이블 세팅을 주문했었고, 혹시 사진 촬영도 해줄 수 있냐는 말에 망설임 끝에 수락했었다. 다방면에 솜씨 좋던 박선수가 테이블 세팅을 맡아 진행하고, 실력은 초보나 열정만은 프로급이었던 내가 사진을 맡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 돌잔치의 주인공이었던 녀석이 이렇게 훅 컸다.
매장 위치가 학원가 바로 옆이어서, 근처 학원에 다니던 준영이는 매장을 제집 드나들듯이 출입했다. 엄마가, 다른 곳 가서 헤매지 말고 써니 이모네 케이크 가게에 있으라는 어릴 때부터 알려준 지침이 고등학생 때까지도 유효했다. 이 녀석의 기호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매장 모바일 금액 상품권을 선물해 줬고, 매장에 올 때마다 그 상품권의 잔액을 사용하는데 화수분처럼 끊임이 없었다. 학원 쉬는 시간이면 들르고, 식사를 마치고 짬이 나면 들르고, 시간이 어정쩡하게 비면 들르고, 부모님이 픽업하러 오는 걸 기다리려면 들렀다. 핫쵸코와 과일주스를 즐겨먹던 녀석이 언젠가부터 커피에 맛을 들이고 에스프레소 더블샷을 찾았다. 한 손으로는 태블릿으로 동영상 강의를 듣고 학습교재를 넘기며, 한 손으로는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준영이다운 여유 그 자체였다.
떡국떡을 어찌 처리할지 써니와 고민하다가 길 건너편 칼국수집 사장님은 요긴하게 쓰시겠다 싶어서 가져다드렸다. 칼국수와 수제비를 메인 메뉴로 하면서, 계절메뉴로 여름에는 냉콩국수와 열무국수를, 겨울에는 떡만둣국과 매생이굴칼국수를 곁들이는 동네 맛집이다. 선물이나 사은품으로 받은 황태, 다시마, 건새우, 멸치 등을 칼국수 육수를 낼 때 쓰시라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가져다드린다. 그러면 칼국수집 사장님은 퇴근길에 국 끓일 때 쓰라며 육수 한 페트씩 챙겨주시기도 하고, 갓 담은 김장김치 한 포기씩 정성스럽게 꽁꽁 싸서 놓고 가시기도 한다.
연세 지긋한 사장님은 떡국떡을 받으시더니 매번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저희는 늘 덕분에 맛있는 김치를 먹는다고 답례한다.
옆집 매장 사장님도 딸과 함께 매장에 들렀다. 케이크 하나를 꼼꼼하게 골라서 구매한다. 축하할 일 있나 봐요, 라고 써니가 인삿말을 건네자 남편이 설 연휴 앞두고 퇴사해서 파티한다며 웃는다. 써니가 약간 당황한 듯 상황을 판단하느라 표정이 애매하다. 매번 늦은 퇴근 후 매장 마감까지 돕는 또 다른 ‘아저씨’인데 어떤 이유로 퇴직을 결정했는지 궁금하고 걱정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 설 연휴 마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3월부터 다른 직장으로 출근하기로 했어요, 라는 뒷말을 듣고서야 환한 미소로 축하 인사를 전한다.
같은 라인에서 안경점을 하시는 형님이 매장 앞을 지나가다가 창가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매장으로 들어오신다. 새해 복 많이 받아, 형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 관리 잘 하고, 형님두요. 네댓 살 연배인 형님으로, 이십 년 전 매장을 개업하기 전부터 그 안경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인생 선배, 자영업 선배 느낌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다. 생각해 보면 그때에는 그 형님도 고작 마흔 살 전후였을 테고, 내가 그 나이를 겪어본 바로는 결코 그 나이에 그 연륜을 갖춰본 적이 없는데 그 형님의 느낌은 언제나 형님이라는 정의 그 자체였다. 설 연휴 지나면 잠시 짬내서 형님네 안경점에 들러 안경이나 새로 맞춰야겠다고 떠올렸다.
지난주에 비해 확연히 추위가 풀린 날씨다. 산책 삼아 슬슬 동네를 한 바퀴 걷는다.
매장마다 출입문에 설날 휴무일을 표시하는 안내문이 붙었다. 대부분 설 전날과 당일인 월요일에서 화요일에 짧게 이틀가량 쉬는 듯하다. 우리 매장처럼 설 당일인 화요일만 쉬는 곳도 여럿이다. 사흘 전체 휴무를 안내한 곳도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자영업이라는 게 마음 편히 문 닫고 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같은 심정으로 휴무 안내를 확인하게 된다. 모두, 짧더라도 충분히 쉬고 사랑 나누고 충전해서 오시길. 이 연휴 기간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일주일에 불과하지만 누군가는 대학생이, 누군가는 새 직장의 일원이, 나에게는 새 안경과 함께 새 풍경이 펼쳐지는 것처럼 나름의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진정한 새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