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구두를 신고

by 영두리

설 연휴 마지막 날, 매장은 잠시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겨 두고 오랜만에 써니와 함께 근처 백화점으로 쇼핑에 나섰다. 주차타워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백화점 본관 연결 통로가 있는 8층까지 올라간 후, 휴일이라서인지 더욱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본관으로 건너간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씩 내려가며 매장을 쭉 훑어보니 진열된 상품들에는 어느덧 봄기운이 가득하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자기 구두 하나 새로 장만해야 하지 않아? 낡고 무겁던데. 한 10년은 족히 신은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자주 신지 않아서 크게 불편한 건 없는데...


대답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써니에게 이끌려 구두 매장 앞에 서 있었다. 써니는 진열장에 전시된 구두를 들어 보이며 어떠냐는 표정을 짓는다. 남성 구두도 예쁜 게 많이 나오네, 보기와 다르게 무척 가볍네, 하며 몇 가지 종류를 추천한다. 매장 점원은 써니 손에 들린 제품 하나하나마다 친절히 설명을 거든다. 아, 이번 시즌에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에요, 정장에도 어울리지만 지금처럼 청바지에도 잘 어울려요, 마침 오늘까지 행사 중이어서 할인 혜택이 꽤 커요, 선생님 이미지와 딱 맞는 것 같은데요.


내 신발 사이즈를 묻고는 쏜살같이 뛰어가더니 박스 하나를 들고 다시 나타난다. 마침 딱 맞는 사이즈의 재고가 있네요, 라며 씩 웃곤 박스를 열어 구두를 꺼낸다.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점원은 바싹 낮게 웅크리고 앉아서 구두끈을 매어주고 구두코와 구두 볼을 눌러 여유 공간이 있는지 확인한다. 한동안 잊고 있던 ‘퍼피독 서비스’라는 용어를 오랜만에 떠올린다. 한 번 걸어보세요, 어떠세요, 불편한 데는 없으신가요?


불편하지는 않냐는 말에 마음이 꽂혔다. 그저 편하지 않냐고 물었더라면 마치 당연히 편해야 함을 강요받는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배려하는 듯한 그 말, 그리고 나의 서성거림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 없이 곁에서 지켜봐 주는 기다림이 좋았다. 다른 때 같으면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하고 다른 매장으로 향했을 텐데 그날은 그냥 답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처음 본, 처음 신은 그 제품으로 정했다.


결제는 써니가 했다. 연말 연초 매장을 오가며 수고 많았던 아저씨에 대한 써니 사장님의 마음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요 며칠 가끔 정장에 구두를 신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 현관에 벗어두었던 오래된 구두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새 신을 신고 새롭게 힘을 내서, 직장에서도 더 열심히 일하고, 매장에서도 더 부지런히 도와달라고, 고마워.


평소에는 편안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새 구두가 생기길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갖춰 입고 구두를 신어야 하는 자리가 늘었다. 직장 후배들 결혼식(신랑 신부가 모두 내 프로젝트에 뛰었던 사내 커플), 거래처 자제분 결혼식, 지인과 직장 내 장례식장 조문 방문이 잇달았다. 심지어 주로 가운을 입던 성가대에서조차도 몇 주 동안 드레스코드를 블랙앤화이트 콘셉트의 정장에 구두 착용으로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구두에 친숙해지고 있다.


사실 새 구두는 아무리 가볍고 부드러운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한동안 불편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일단 내 발 크기에 맞는 사이즈로 구입했음에도 구두를 신고 벗을 때 퍽퍽한 느낌이 없어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분주히 돌아다니다 보니 매장 시착 시 몇 걸음 걸을 때에는 못 느꼈던 이질감이 없진 않다.


딱딱한 구두와 내 발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같이 살 맞대고 살아야 할 처지라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일종의 통과제의다. 구두 가죽이 휘어지고 구부러져 발에 맞춰지든지, 발 한켠에 물집이 잡히든지 둘 중 하나다. 대개 구두의 항복으로 결론이 났었다. 발은 부드럽지만 마침내 강하다.


최근 들어 주변의 일상이 마치 낡고 헤지고 무거운 옛 구두처럼 느껴졌었나 보다. 오래 지내고 익숙해진 공간과 사람들 관계 속에서, 아침에 일어나 회사로 출근하고, 퇴근 후 매장에 들러 마감일을 돕고, 집에 가서 씻고 TV 드라마를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가 다시 오늘과 비슷한 내일을 맞이하는 일상이 되풀이되던 차였다.


어쩌면 새 구두가 일종의 활력을 가져왔다. 구두가 내 발에 맞춰지기를 기다리는 이 시간은,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서로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며 맞춰온 세월과 닮아있다. 직장의 첫 출근, 인생 첫 매장 개업, 모든 새 만남들. 딱딱했던 첫 만남이 부드러운 일상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물집과 통증을 견뎌왔던가.

써니 사장님이 결제한 것은 단순한 가죽 신발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걸어갈 수만 킬로미터의 여정에 대한 응원이었을 테다. 낡은 구두를 벗어 던진 자리에 새로 돋아난 활력이, 나를 더 부지런한 남편으로, 더 성실한 직장인으로, 그리고 더 다정한 매장 아저씨로 이끌어주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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