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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안러버 Oct 25. 2022

멀고 먼 발리 가는 길 -2

지난 번 글을 쓰고 열흘이 넘게 흘렀다. 

변화가 있었다면, 우리는 드디어 자카르타에서 남편의 고향으로 넘어왔다는 것, 그리고 나의 1년 체류 비자가 나오고, 아이가 남편의 가족증명서에 포함되었다는 것 정도. 이상하게도 이 나라는 혼인신고, 출생신고를 모두 해도 가족증명서에 자동으로 등록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나는 아직 인도네시아에 오래 체류하지 않은 외국인 신분이기에 가족증명서에는 포함될 수도 없고 5년짜리 영주권이 나와야만 가족증명서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한다.


1년 체류비자를 받는 과정도 꽤나 복잡했다. 이 도시의 이민청에 먼저 가서 (이미 인터넷으로 다 작성했던) 서류들을 다시 작성하고, (다 알고 있는) 서류 조건에 대해 다시 기나긴 설명을 듣고, 인지가 필요한 정부기관이라면 보통 옆에서 파는 천원짜리 인지를 사기 위해 다시 시내로 나와 인지를 사고나니 점심시간. 인지를 붙인 서류를 제출하니 은행에 가서 정부계좌로 비자수수료를 송금한 후 영수증을 가지고 점심시간 이후 돌아가, 다시 내 사진을 찍고 지문 채취. 그리고 체류를 허한다는 도장이 찍힌 여권을 돌려받는건 그 다음 날이었다. 그와중에 아이와 남편, 내 신분증을 번갈아 보던 직원은 "이 아이는 이 아내에게서 낳은 아이가 맞느냐"고 물어봐서 황당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나라는 종교적으로 일부다처가 가능하기에 터무니 없는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났느냐? 이젠 동사무소-시청에 각각 (그렇다, 각각) 나의 거주지를 신고해야한다는 것. 먼저 남편의 주소지가 속한 마을 통장에게 확인 서명을 받은 후 동사무소에 가서 동사무소에서 서명을 확인했다는 서류를 받아 다시 시청으로. 이 과정에서 재밌었던건 마을 통장은 아주버님 동창, 동사무소 소장은 시누이 동창, 시청에 가도 아, 너가 그 집 막내아들 아구스구나!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모든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다 알고 있었다. 남편을 따라 동네를 돌아다녀보니 옛날 어렸을 적 명절에 아빠를 따라 강원도 아빠 고향에 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왜 슈퍼 주인 아주머니도, 슈퍼에 들른 손님도 아빠를 알까? 어떻게 아빠는 동네에 있는 가게들 주인이 다 어느 집 아들이고 딸인지 기억할까. 명절이면 할머니 댁에 아빠 친구들이 약속도 없이 줄지어 인사를 오고 나 또한 아빠를 따라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으레 듣는 "xx 아들 딸이 이렇게 컸어?" 소리와 함께 손에 쥐어지는 용돈에 동생과 함께 들떴던 기억이 났다. 


이쯤되니 운전면허증 만료기한을 대사관에서 바로 연장하고, 기본적인 관련 증명서는 내가 스스로 정부전산시스템에 접속해서 인쇄하고 출생신고, 혼인신고를 대사관에서 기다림 없이 10분 안에 처리하고 돌아오는 나를 경의롭게 바라보던 남편이 족히 이해가 되었다. 독수리 타법으로 연신 나의 이름과 여권번호, 온갖 정보들을 입력하면서 계속 오타를 내서 1시간을 지체시키면서도 싱글벙글 중간중간 간식까지 챙겨먹기에 바빴던 시청직원 아저씨를 보면서 원래 내가 공부했던 국제개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을 매번 겪었겠구나, 또 개발학을 같이 공부했던 현장에 나가 일하고 있는 친구들은 이런 상황에 도가 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고 긴 대기 시간 남편과 낡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자니 사뭇 국제결혼의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실은 남편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싱가포르에서 아이를 키우며 국제결혼의 어려움을 느낀 적은 많지 않았다. 나는 한국 쪽 서류처리를 담당해왔기 때문에 한국의 고도로 발전된 행정시스템 덕에 혼인신고, 출생신고, 여권발급등 행정적으로 어려울 일이 없었고 싱가포르 자체가 워낙 국제결혼을 한 부부가 많은 곳이기에 한번도 우리가 특이하다거나 어려운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카르타도 아닌 시골이 고향인 남편이 그나마 같은 인도네시아인과 결혼했다면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을꺼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그야말로 일처리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있으니 남편의 느긋하면서도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내가 마음먹고 계획해도 어차피 상황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고 내가 정한 타임라인에 맞추어 진행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지난 한 달을 인도네시아에서 지내며 여러 행정활동에 부딪혀본 결과 인도네시아인들은 자라면서 j형으로 자라기는 극히 어려워보였다. 더구나 일처리가 빠르고 효율적인 나라에서 온 나의 눈에는 더욱 그래보였다. 한국에서는 클릭 몇 번이면 받을 수 있는 증명서를 하루 종일 기다리고 설명을 듣고 설명을 해준 후에야 겨우 받아내는게 벌써 몇 차례. 이 또한 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면 익숙해져야하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 발붙일 곳이 없다는 이 오묘하고 동동 뜬 기분은 어찌할 수 없다. 남편은 이 곳에서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영주권 지원을 시도해보자는 생각이고 나는 이미 1년 체류 비자를 받았으니 빨리 발리로 들어가 터전을 찾아보자는 생각인데...


언제쯤 발리로 갈 수 있을까. 아직 그 길은 꽤나 멀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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