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한국 비자가 나온 날 바로 우리는 오후에는 다음 날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사고 저녁에는 저렴한 호텔을 3박 예약한 후 다음 날 아침 발리 공항으로 향했다. 더 이상 형님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카르타에서의 무료함 때문이었다.
싱가폴에서 자카르타로 넘어오면서 들고왔던 짐과 그 전 선편으로 부쳤던 짐들은 이미 예전에 자카르타 형님댁에 도착해 있었고 우리가 발리에서 살 집을 구해야만 그 모든 짐들을 발리로 보낼 수 있기에 결국 우리는 세 식구 수에 맞춰 짐 가방 세 개를 달랑 들고 발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했을 땐 오후 세시 쯤이었는데 우기인 발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예약한 호텔은 그 전 날 온라인으로 알아보며 가능한 곳을 찾은 곳이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비가와서 어둡고 습한 상황에서 체크인을 해서인지 첫 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사흘 만 있을 곳이라 짐도 제대로 풀지 않고 집히는 대로 옷을 입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해변가로 향했다. 우리가 묵은 곳은 북쪽 사누르지역 해변가였고 주변에는 맥도날드, 피자헛, 엄청 큰 한식집까지 관광객들이 갈 식당이 즐비했다. 비는 다행히 그쳤지만 바깥은 여전히 축축했고 그래서인지 저녁시간 해변가 식당들도 한산했다. 비교적 저렴하다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남편과 맥주를 기울이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5월에 관광객으로 이 해변에 와서 아이와 즐겁게 거닐고 갔던게 엊그제같은데 내가 이 곳에 살러 왔다니… 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꽤나 긍정적이었다. 3일 이 곳에서 지내는 동안 쉽게 한달 살 곳을 구해 시간을 벌어 한 달 동안 집을 돌아보며 괜찮은 곳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아침 5월 답사 때 와서 먹었던 나시아얌을 꼭 먹어야겠다며 같은 해변가로 나왔지만 그 가게는 문을 닫았고 우린 배고픈 아이를 데리고 다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해변가 브런치집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마음이 이상했다. 기쁜 마음으로 이 곳을 즐기고 현지보다 비싼 식당 가격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 주변 휴양객들 사이에서 우리는 똑같은 가격을 지불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런 비싼 밥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자꾸 조급해지고 죄책감이 몰려왔다. 휴양객처럼 살고 휴양객처럼 돈을 쓰고 있지만 휴양객이 아닌 묘한 상황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오토바이를 빌려 세 식구가 다닥다닥 오토바이를 타고 한 달 지낼 곳을 구하기 위해 하루종일 몇 곳의 홈스테이와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예산을 넉넉하게 잡고 한달 살기 겸 휴양을 하러 온 관광객들은 풀빌라를 찾겠지만 우리는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임시거처를 구해야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이는 덜덜거리는 오토바이 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엄마 아빠의 체온 사이에서 툭하면 잠이 들었다. 잠에 든 아이를 들쳐 안고 본 게스트하우스는 시설이 너무 낙후되었거나 (구글에서 본 사진이랑 천지차이이기도 하고 사진은 비슷하다쳐도 습한 곰팡이 냄새는 직접 가봐야만 알 수 있었다. 오죽하면 남편과 구글맵에서 냄새를 맡아보는 옵션이 있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다 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의 숙박을 반기지 않거나, 시설이 괜찮으면 이미 예약이 풀로 차있었다. 아이에게 계속 바깥 밥을 먹이기 싫어 작게나마 씽크대가 있어야한다고 고집을 부린 나도 이 어려움에 한 몫 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서양인들의 휴가시즌인 12월을 맞아 장기로 싸게 방을 주기보다 단기로 정가를 받는게 더 이득이었던 것이다. 당장 다음 날이 체크아웃인데 잘 곳이 없다니 막막했다. 가까스로 남편이 지금 묵고있는 호텔의 다른 방에서 하루를 자고 그 다음 다시 방을 옮겨 3박을 더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방값이 만만치 않을 뿐더러 그렇게 임시로 기한을 연장해가며 한 달 숙소를 구하다간 막상 진짜 목표인 1년 살 집구하기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할 것 같아 답답했다. 무엇보다 두 달 전부터 시작된 짐 싸고 짐 풀기를 그만하고 싶었다.
그렇게 밤에 구글맵을 뒤지며 게스트하우스들을 찾다가 잠이 들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 악몽을 계속 꿨다. 주로 어떤 마감기한이 정해져 있어 쫓기면서 불안해하는 꿈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같은 사누르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보여주었는데 주방도 있고 자그마한 정원이 달린 곳이었다. 리뷰가 한 개밖에 없는 것이 불안했지만 이 호스트가 운영하는 다른 곳의 리뷰가 다 좋아서 그걸 믿고 일주일을 덜컥 예약했다. 만약 체크인 해서도 지낼만하다면 더 연장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가격은 전에 지내던 호텔과 비슷하지만 주방이 있고 정원이 있으니 장기로 지내기에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는 비가 쏟아지는 오후 에어비앤비로 거처를 옮겼다. 알고보니 오래된 게스트하우스를 어설프게 레노베이션을 해서 비싼 값에 에어비앤비로 운영하는 듯했다. 나름 새 방이었지만 화장실에서는 여전히 냄새가 지독하고 문은 잘 닫기지 않는다. 우리 정말 발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