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리안러버 Aug 30. 2023

영주권 지원에 대학성적표가 필요한 나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인이자 싱가포르 영주권자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정착했을 때 처음 1년은 영주권자 배우자 비자로 싱가폴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자 비자로는 취업도 제한적일 뿐더러 1년에 한번씩 비자를 갱신해야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우리는 싱가폴 영주권에 지원했다.  


흔히 영주권이라하면 무기한 그 나라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싱가폴 영주권은 다르다. 5년마다 영주권을 갱신해야하고 그 와중에 2년마다 재입국허가(외국으로 출국했다가 싱가폴로 돌아올 수 있는 권리)를 갱신해야한다. 갱신이라고 하지만 재심사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 5년간 싱가폴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지 여러 기준을 따져본 후 영주권을 갱신해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싱가폴로서는 아마도 필요한 절차일 것이다.


싱가포르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에이전시를 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온라인 지원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필요한 서류를 모아 나와 아이의 영주권을 신청했었다. 싱가폴 영주권은 싱가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 심사과정과 기준이 미스테리로 불린다. 싱가포르에 오래 산 사람 우선도 아니고, 어느 특정 국적 우선도 아니며, 심사 기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심사의 어느 과정을 지나고 있는지 지원한 사람들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떠도는 낭설에 의하면 근방국에서 온 중국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인들, 고학력자들, 아들이 있는 가정(싱가폴도 남자는 국방의 의무를 져야한다) 등등이 영주권 발급의 우선순위라고들 하지만 정확한 기준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에 해당하는 이들도 종종 리젝을 당하거나 심사기간이 매우 오래 걸리는 경우도 봐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싱가폴 명문대학 중 한 곳을 나와 시민권자와 결혼한지 한참이 된 남편 친구의 아내는 국적 때문인지 영주권을 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내가 영주권을 지원하기 위해 정리한 서류 목록에는 최종학력증명서, 그리고 대학(혹은 그 이상의 학위과정)에서의 성적표 등등이 있었다. 영주권을 받으면 취업하기가 훨씬 수월했기에 당시에는 영주권 지원을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나라에 오래 살기 위해서는 공부도 잘해야하는건가?" 대학원 지원 이후 처음 대학교 성적표를 다시 온라인으로 발급받으며 대학 때 더 열심히 공부할껄 그랬나 하는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도시국가에 아무런 자원이 없는 이 나라는 항상 자랑스럽게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자원은 능력있는 인적자원이라고 천명해왔다. 그러니 영주권 심사에 그만큼 공을 들이는 수밖에 없을꺼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엘리트주의 사회에서는 남들이 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도태되겠다는 허무함도 들었다. 이런 곳에서 아이를 키워도 되나? 막 태어나 꼬물거리다 잠든 아이를 보며 영주권 서류를 모으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결국 영주권은 기다림 끝에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5년간 그들의 나라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영주권을 신청할 때 이미 싱가포르를 떠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일탈과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