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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안러버 May 22. 2020

아이를 만난 이후

아이를 키우면 인생이 바뀌게 될 것이란건 이전에는 들어도 또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조용한 방 안에서 혼자 멍때리는걸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동안 단 1분도 혼자 가만히 조용하게 있을 수 없다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분인지 나윤이가 태어난 이후 나는 나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크게 동요했다. 아이가 자고 있더라도 이 좁디 좁은 공간에는 남편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아이가 자고 남편이 없더라도 그동안 내가 방해받지 않고 해야할 집안일들이 산적하게 쌓여있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가만히 앉아 글을 쓰거나 생각하는 걸로 풀었던 스트레스들이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다 끝내는 남편에게로 또는 울며 떼쓰는 아이에게로 향하는 울분과 짜증이 되어버렸다. 


육아서에서는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하지 말고 잘한다고 믿으라 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가. 

어느 집은 TV를 아예 아이에게 안 보여주는 집이 있다던데, 어느 집은 아이에게 삼시세끼 갓 지은 따뜻한 국과 반찬을 내어주는 집이 있다던데, 어느 집은 아이가 매일 입는 옷에 주름하나 없이 항상 다려져 있던데, 어느 집은 아이가 집에서 매일 다른 교구와 활동으로 지루할 틈 없이 지내던데...


살아오며 나를 옥죄던 내가 세운 나의 원칙들. 가치관이나 관계에서의 원칙처럼 중요한 것에서부터 설거지, 빨래는 이렇게 해야하고 정리는 저렇게 해야한다는 크고 작은 내 삶의 규칙들.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십계명 이외에도 나는 살면서 지켜야할 원칙들이 너무 많았다. 그건 나를 그렇게 키운 엄마의 탓도 있다. 이렇게 해야 가장 효율적이고 바른 길이라고 보고 듣고 자랐기에 다른 방법은 귀찮고 덜 효율적인 것, 더 나아가 틀린 것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나와 같다고 생각하고 시작하지만 정작 정반대인걸 알게되는 결혼. 나 역시도 남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다. 남편의 설거지하는 방법이, 찬장을 정리하는 방법이,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키는 방법이, 아이의 책을 치우는 방법이,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이 나와 다르기에 나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또 그 방법을 존중하지 않고 나의 방법을 고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엄마가 아직도 아빠의 생활패턴에 대해 30년이 넘게 전화기 너머 불평하고 있는 모습이 곧 나의 미래인 것만 같다. 종종 남편에게 묻곤한다.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런건지 아니면 내가 아빠같은 남자를 만난건지. 


나도 많은 것에서 자유롭고 싶다. 가정에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활동적인 아이에게 활동적으로 대응해주지 못하는 자책감, 임신기간부터 아이가 태어나 18개월이 되기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드는 내 인생에 대한 회의감, 더 관대하게 남편의 삶의 방식을 사랑해주고 포용해주지 못하는 미안함, 그렇지만 또 내 눈에 비효율적으로 보인다고 뒷모습에 대고 한숨만 푹푹 쉬는 나의 옹졸함. 언제까지 이 싱가폴 생활이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감, 이렇게 부족한 내 밑에서 아이가 과연 바르고 구김없이 잘 자라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까지.


아이를 재우고 놀아주고 먹이는 데에 모든 나의 신경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아니, 실은 조금 남은 에너지는 남편을 다그치고 잔소리하는 데 쓰고 있는 것 같다. 내 시간이 너무너무 필요하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아무 배경음악, 동요, 팟캐스트 같은 소음없이 선풍기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다. 한 시간째 졸음이 눈에 그득한데도 자기 싫어 침대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속으로는 세탁기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된 빨래를 해가 지기 전 빨리 널어야하는데 그래야 구김이 덜하고 빨리 마를텐데, 아이 저녁메뉴로 생각해놓은 소고기를 빨리 해동해야 제 시간에 요리를 시작할텐데 수많은 계산과 계획들이 오간다. 그리고 좀처럼 자지 않는 아이에게 화를 벌컥 낸다. 과연 이 아이는 어느 정도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매일 보는 아이인데도 알 길이 없다. 말을 시작한들 내가 알 수 있을까. 내 속에서 나왔지만 내가 아닌 인격체인데.


아이를 통제하고 주무르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계속 되뇌이지만 이렇게 내가 세운 원칙에 갇혀사는 내 자신이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두렵기만 하다. 아빠를 닮아 좀더 자유롭게 자랐으면 좋겠는데. 원칙이 많은 내 인생에 아이와 남편이라는 두 변수가 들어와 수시로 내 계획과 계산이 뒤바뀌는게 이제는 좀 적응이 되었으면 좋겠건만 여전히 나는 내 방식을 고수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어떻게 내려놓아야 하는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저 두 변수를 어떻게하면 지긋이 바라보며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나의 지금 모습은 한없이 동떨어져있는 것만 같아 지금의 나를 나로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이러려고 그 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애쓰고 살았나 자꾸 회의감만 밀려온다. 내 시간만 조금 있어도 적어도 내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긴할 것 같은데. 남편이 뭘 할라치면 나는 이러고 있는데 너는? 이런 못난 생각만 들어 원망만 하게 된다. 


도대체 우리 엄마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도대체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엄마들은 이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만 이런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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