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소설
/ 서기 568년 7월 24일 여름. 종일 비.
<도공이 기록물>
왕흥사 옆 공방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향로 주물 틀에 구릿물을 붓는 날이다. 정해공주님이 아버지 성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사찰을 세웠을 때, 세상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다. 나도 그 덕분에 별다른 이목을 끌지 않고, 이곳에 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서 놀고 먹는 건 아니다. 내게도 직업이 있다. 그러나 품계는 없다. 나는 향로를 만든다. 허드렛일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주물틀을 만들어 연습한다. 손에 쉽게 익지 않는다.
공주님께 작은 가락지를 만들어 드렸다. 공주님은 둘이 있을 때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이름도 부르고 어렸을 때처럼 재밌게 놀자고 그러셨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공주님은 궁 생활이 무척이나 재미없나 보다. 공주님이 뽀얀 얼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난 웃음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향로 틀에 구릿물을 부으러 가야 하는 시간이다. 향로는 중요한 물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른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로를 만들어 공주님께 드리고 싶다.
<공주님 기록물>
안녕하세요. 저는 백제의 정해공주예요. 저를 언제나 졸졸 따라다니는 기록관이 제게 하도 부탁을 많이해서 오늘부터 일기라도 쓰려고 해요. 왕실의 공식 기록이 아니라 따로 남기고 싶대요. 얼마 전에 왕실 기록관이 된 아이인데, 눈이 아주 맑아요. 비밀을 목숨처럼 지키는 아이라서 제 이야기를 지켜주리라 철썩같이 믿고 있어요. 모두 이야기하려고요. 제 오랜 친구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왕흥사 옆 공방에 제 친구가 있어요. 제가 주도해서 아버지를 기린다는 말로써 사찰을 세웠지만 그 친구랑 헤어지는 게 싫었어요.
그 친구가 손재주가 좋거든요. 여기로 데려오려고 절을 세우면서 그 옆에 향로를 만드는 공방도 함께 만들어요. 그곳에서 친구가 지금 지내고 있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어릴 때 꽃반지를 곧 잘 만들어 제게 주던 친구였어요. 그 친구 이름은 아직 말 못해요. 제가 흠모하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르거든요. 아무리 제가 공주라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부끄럼이 많아지더라고요.
그 친구를 만나면 괜히 심술도 부리고 그래요. 어제는 조그만 가락지를 주는 거예요. 꽃 무늬가 빙둘려 있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제 약지 손가락에 꼭 맞는 가락지예요! 근데 저도 모르게 제 얼굴이 너무 빨개지는 거예요. 분가루 때문에 안 들켰지 하마터면 제 마음을 들킬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낚아채듯이 가락지를 가져왔죠. 저 좀 나빴죠? 내심 좀 미안해요. 그래도 허허 웃으며 받아주는 마음 넓은 친구예요. 이제는 눈만 감으면 그 친구가 보여요. 한 밤 지날 때마다 더 좋아져요. 어쩌면 좋을까요. 이게 사랑일까요?
궁 생활은 너무 힘들어요. 왕실의 법도는 너무 엄격하거든요. 사람이 숨은 쉬어야죠. 서역에서 건너온 분가루를 매일 아침마다 발라야 한대요. 납을 갈아서 만든 거라는데 살결이 하얘져요. 살결이 하얘지는게 뭐가 좋은 건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얼굴이 허여멀건 해서 우스꽝스러워요. 또 얼마나 독한지 볼에 대고 두드리기 시작하면 숨을 참아야 해요. 숨을 조금만 들이켜도 콜록콜록 기침이 나요. 궁 생활 하나도 안 좋아요. 에휴 제가 겨우 숨만 쉬며 삽니다.
<도공이 기록물>
점심 때가 조금 지났다. 날씨가 좋지 않다. 어제 밤에는 붉은 번개가 쳤다. 붉은 번개가 치면 나라에 흉흉한 일이 벌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성왕이 전사하셨을 때도 붉은 번개가 쳤다. 어릴 때 공주님은 번개를 많이 무서워하셨다. 번개를 칠 때마다 오들오들 떨던 공주님이 기억났다. 공주님 걱정에 향로 만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주님께 드릴 향로도 몰래 몰래 만들고 있다. 오늘처럼 집중력이 낮을 땐 공주님 꺼는 만들지 않는다. 보통 향로보다 더 크고 장식을 더 많이 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그르치기 때문이다. 공주님이 들려주셨던 꿈 이야기를 담아 만들고 있다. 아기자기 한 걸 좋아하셔서 그렇게 만들다 보니까 시간도 서너 곱절 더 든다. 향로를 몰래 만들다가 걸리면 빼앗긴다. 혹시 들킬까 봐 걱정되어 잠도 많이 줄었다.
<공주님 마지막 기록물>
안녕하세요. 정해예요. 어김없이 기록관이 찾아왔네요. 제가 당나라에 좀 다녀와야 해요. 그런데 여정이 너무 길어요. 왕복하려면 일 년이나 걸린다고 해요. 소문이 이상하게 났어요. 도공이와 저와의 관계를 아무래도 들킨 것 같아요. 가끔 만났을 뿐인데 손을 잡았네 어쨌네 그런 소문이 돌았어요. 딱 한 번 도공이가 손을 데었길래 살펴보려고 덥석 손을 잡긴 했지만, 정말 손만 잡았거든요. 맹세코!
근데요. 어릴 때 이후로 처음 도공이 손을 잡았거든요. 좀 손바닥은 까끌까끌하지만 단단하고 두툼하더라고요. 손을 만지작 거리며 들여다보는데 또 얼굴이 빨개져서 혼쭐났네요. 괜히 등짝만 때렸어요. 등짝이 어찌나 단단한지 제 손만 아프더라고요. 도공이에게 당나라 다녀온다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직 말하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고민 좀 해야겠어요. 며칠 전부터 계속 명치가 아파서 의원에 다녀왔는데 숙면을 취하라고 하셨어요. 오래 말하기 어려워요. 아침마다 바르는 분가루만 안 발라도 살 것 같은데 왕실의 법도가 뭔지... 사람 잡겠네요.
<도공이 기록물>
공주님이 다녀가셨다. 구릿물을 다루다가 내가 손을 다친 걸보고 공주님께 기록관이 보고한 모양이다. 급하게 여기로 오시는 바람에 왕실 사람들 여럿이 공주님 모습을 본 것 같다. 손을 꼬옥 잡아주시는 공주님 손길이 어찌나 보드라운지 구릿물에 데인 손이 다 나은 것 같았다. 조심하지 그랬냐며 내 등짝을 때렸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등짝을 때린 공주님 손바닥이 점점 벌게졌다. 보는 눈이 많아서 공주님 손을 잡고 예전처럼 호오~ 불어줄 수 없었다. 공주님이랑 개울가에서 놀던 때가 생각났다. 너무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공주님 손을 다시 잡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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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당나라로 떠나셨다. 기록관이 공주님께서 다녀오시려면 1년도 넘게 걸린다는 말을 전해왔다. 이렇게 갑작스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아무래도 공주님이 공방에 와서 내 손을 잡은 그날 이후에 퍼진 소문인 것 같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늘 커져간다. 아마 난 이 공방에서 쫓겨나겠지. 그 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을 닮은 향로를 만들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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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소식이 도착했다. 기침을 계속한다고 한다. 걱정이 많이 된다. 매일 자기 전에 무사히 다녀오시라고 기도를 올린다. 병세가 심해지셨는지 밤새 잠도 잘 못 주무신다고 한다. 화가 난다. 왕실의 의원들도 당나라 황실의 의원들도 모두 이유를 모른단다. 공주님이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향로도 완성했다. 어서 공주님께 드리고 싶다. 공주님이 꿈에서 봤다고 했던 장면을 모두 향로에 담았다. 분명히 좋아하실 거다. 공주님만 급히 귀국한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많이 위독한 것 같다. 채비를 갖추고 공주님께 배웅을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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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 내가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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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곁에 향로를 놓아 드려야 하는데 향로를 빼앗겼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공주님의 향로를 바라보던 그 자식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 내가 공주님 향로를 반드시 되찾아올게요. 공주님...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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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향로를 드리러 가네요. 사랑해요... 정해공주님.
도공이는 자신이 만든 향로를 끌어안고, 누구도 얼씬거리지 않으며,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늪으로 대향로를 끌어안고 걸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 왕실 기록관 장레오가 기록하다 -
백제 금동대향로는 1993년 발굴 당시 진흙 속에 있었다.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이 발굴되었는데, 조사발굴단은 이 섬유 조각이 백제 금동대향로를 감쌌던 것으로 추정했다. 감마선으로 대향로를 단층 촬영해보니 세계에서 유일한 이음새가 전혀 없는 대향로였으며, 한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발굴 후 24년이 지난 오늘도 백제 금동대향로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 위키백과 백제 금동대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