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랑을 꿈꾸는 두 남녀의 이야기
시작
하늘이 밝아왔다. 송헌은 창 밖의 광경을 선향에게 설명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미처 그 말들을 모두 꺼내놓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송헌의 목소리를 들으며 선향은 미소를 지었다.
"해가 붉어요. 노랗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푸르기도 해요." 송헌이 말했다.
"나도 보여요. 옆에서 보고 싶어요. 지금 그리 가고 있어요"
"네??? 어떻게 오려고요. 추워요. 온통 얼음이에요. 내가 그리 갈게요."
"사실 30분 전부터 걷고 있었어요. 그냥 송헌 씨 옆에 있고 싶어요."
"지금 제가 갈게요. 어디 들어갈 곳 없어요? 따뜻한 곳이요."
"편의점이 앞에 있어요. CU 중앙로역점 이에요." 선향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 어딘지 알아요. 거기 잠시 있어요. 지금 가는 중이에요"
"천천히 와요. 미끄러워요. 전화 끊지는 마요."
"네, 안 끊어요. 그래도 눈이 얼음으로 바뀌지는 않아서 내려갈 만해요."
"근데 제가 배터리가 거의 없어요 하하"
"거기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만 말아요. 가고 있습니다."
"네, 돈도 안 들고 와서 편의점에 그냥 멀뚱히 서있어요."
"하하 괜찮아요. 나가라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죠"
"불쌍한 표정 연습해둡시다."
"그건 자신 있어요"
"거의 다 와가요. 조금만 있으면 도착"
"1% 남았어요." 뚝. 전화가 끊겼다.
송헌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편의점을 바라봤다. 통유리 문에 바짝 붙어 연신 손을 흔들고 있는 선향이 보였다. 토끼무늬 벙어리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선향의 두 볼은 지금 떠오르려 하고 있는 아침해만큼이나 붉었다. 송헌은 단숨에 선향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았다. 선향은 송헌의 손이 따뜻하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송헌은 손이 따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많이 기다렸죠?"
"괜찮아요. 알바 학생이 따뜻한 커피도 줬어요."
"고마운 친구네요." 송헌은 앳되보이는 학생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커피값을 치렀다.
"아직 해 뜨지 않았죠? 해 뜨는 거 같이 보러 가요!" 선향이 말했다.
"곧 뜰 것 같은데..."
"일단 나가요 우리" 선향이 외치듯 말했다.
송헌과 선향은 알바 학생에게 다시 고맙다고 인사하고 밖을 나왔다. 차는 여전히 시동이 켜있었다. 선향은 조수석에 앉았다. 히팅 열선에 전원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선향은 몸이 나른해졌다. 벙어리 장갑을 대시보드에 올려놓고 신발을 문 밖으로 내밀어 눈을 탁탁 털었다. 송헌은 어디가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출근에 대한 걱정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자 지금부터 저는 눈을 감을게요. 어디로든 데려다 주세요. 멋진 광경이 앞에 있을 때, 눈을 뜨라고 해주세요." 눈을 감으며 선향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눈 감고 있어요." 송헌은 선향이를 바라봤다. 송헌은 선향이가 잠에서 깰까 봐 운전대를 조심히 틀었다. 왼쪽 백미러를 확인하고 천천히 출발했다. 송헌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넓게 펼쳐 선향을 덮어줬다.
눈 덮인 학생관 옥상에서
눈 덮인 학생관 옥상에서
송헌은 조수석에서 잠자고 있는 선향을 바라봤다. 해돋이를 보러 어디로 갈지 떠올렸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자주 찾던 학생관 옥상이 떠올랐다.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위치한 건물이다. 눈이 그치고 하늘이 열렸을 때 도착했다. 송헌은 자고 있던 선향을 깨우려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선향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송헌의 손에 대고 비볐다. 송헌은 선향의 얼굴이 부드러운 솜털 같다고 느꼈다. 선향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서 기지개를 켰다. 선향이 팔을 들어 올리는데 소매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 왔어요."
"으아함. 미안해요.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어디죠. 저는 아직 눈을 감고 있답니다." 실눈을 뜨고 선향이 말했다.
"잠시만요. 제가 먼저 내려서 안내할게요"
송헌은 선향에게 입혀주려고 외투를 벗으며 조수석 차문을 열었다.
"추워요." 선향에게 외투를 입혀주며 송헌이 말했다.
"고마워요. 아아 따뜻하다"
"발 조심해요. 천천히 걸어요. 내 손 잡고"
"네네"
"자 이제 눈 떠 봐요."
"우와..."
선향은 어스름한 햇빛과 밤의 끝자락이 공존하고 있는 광경에 말을 잊었다. 천천히 외곽의 집들과 시가지의 빌딩들을 바라봤다. 이 모든 광경을 담으려는 듯 선향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차들은 애매한 여명의 기운에 혼란을 느끼는듯 했다. 라이트를 켠 차와 그렇지 않은 차가 뒤섞여 거북이 경주를 하고 있었다. 거대한 빌딩들은 저마다 머리 꼭대기에서 허연 김을 뿜고 있었다. 대지 위의 모든 것들은 밤사이 두툼하게 쌓인 눈으로 키가 한 뼘이나 커져 있었다. 분주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제설용 차량만 6차선 도로 위를 느릿느릿 움직였다. 멀리 산을 바라보니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햇빛은 산꼭대기부터 점점 하강하고 있었다. 눈은 햇빛과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눈은 물이 됐고, 선향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송헌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콕콕 찍어냈다.
"정말 좋아요. 정말 행복하면 눈물이 나나 봐요."
"오랜만에 오니 저도 기분이 좋아요" 송헌이 말했다.
선향은 망설이지 않고 다음 말을 꺼냈다.
"나, 아저씨하고 같이 살 거예요. 아니 송헌 씨"
"좋아요." 송헌이 대답했다.
"3초만 망설였어도 취소했을 거예요." 선향이 웃으며 말했다.
송헌은 양팔을 벌려 선향을 감싸 안았다.
카페에서
"돌아갈까요?" 송헌이 말했다.
"네. 좋아요" 차 문을 닫았다. 서로를 바라봤다. 볼이 발그레해진 선향이 송헌의 손을 잡아끌어 볼에 갖다 댔다. 송헌은 오랫동안 어둠의 미로를 헤매다가 비로소 출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선향은 휴식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일단 집에 들러주세요." 볼을 비비며 선향이 말했다.
"네 그래야죠." 차로 이동하는 내내 선향은 송헌을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근데 출근 안 하세요?" 선향이 말했다.
"네 해야죠."
"어디로 출근해요?"
"구름 도서관에서 일해요."
"아 거기 저도 가끔 책 읽으러 갔었어요. 근데 왜 한 번도 못 봤죠???"
"저는 고서를 보관하는 서고에서 일하기 때문에 마주치기 어려웠을 거예요. 서고에 하루에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있어요. 선향 씨는 출근 언제 해요?"
"저도 카페에 9시까지 가야 해요. 오늘은 6시간만 일하면 돼요."
선향의 집에 도착했다. 선향은 양치질을 하며 몇 가지 화장품과 칫솔, 사진 앨범 한 권을 챙겼다. 선향은 거울을 보며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흩뜨렸다. 그러면서 코를 찡긋거렸다. 송헌은 앞으로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 기대했다. 그러고는 집에 쌓여있는 책들이 왠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게 다예요." 짐이 너무 단출한 게 아닌가 라는 송헌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선향이 말했다.
"늦겠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오면 되죠."
"네 출발! 저는 카페에 가볼게요. 역 안에 있는 그 카페 알죠?"
"네 알아요. 저도 출근하려면 한 시간 남았는데 제가 뭐 도와줄게 있을까요?"
"있어요 우리 카페에 같이 가요." 잠시 생각하더니 선향이 말했다.
쪼그려 앉은 선향이 문 아래에 달린 보조키를 열었다. 선향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침 해줄게요. 세수하고 오세요." 선향이 말했다.
"아 괜찮아요. "
"프라이할게요. 먹고 가세요. "
"고마워요. "
송헌은 화장실로 가서 찬물을 틀었다. 얼음에서 방금 녹은 듯한 차가운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세수를 했다. 정신이 들었다. 시계를 봤다. 8:30분을 가리켰다. 종이타월을 몇 장 뽑아 물기를 닦았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였다. 수염은 조금 자랐지만 반드시 깎아야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양치는 출근하자마자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볼일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니 고소한 베이컨 굽는 냄새가 났다. 지글지글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카페라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라테 위에는 작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송헌은 커피 향과 지글거리는 소리와 수줍게 생긴 하트 덕분에 오랜만에 잊을뻔했던 감정이 다시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었다. 선향이 접시를 두 개 들고 나왔다. 접시에는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바나나도 있었다. 송헌과 선향은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었다. 송헌은 바삭거리는 베이컨을 잘라서 선향에게 먹여줬다. 베이컨을 오물거리며 선향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staff only라는 방에 들어갔다. 곧 익숙한 노래가 둘만의 공간에 울려 퍼졌다. Joe cocker "You are so beautiful"이라는 노래였다.
내 손을 잡아요
"자, 내가 손 잡았으니까 송헌 씨도 나를 한 번 잡아봐요." 선향은 송헌의 손을 잡고 말했다. 송헌은 선향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러자 선향은 뒤로 손을 뺐다. 송헌은 힘없이 손을 놓치고 말았다.
"꽉 쥐어야 해요. 한 사람만 꽉 쥐면 다른 사람은 매달려야 해요. 매달리는 것은 무척 힘든 거라서 결국은 놓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놓치고 싶지 않은 만큼 꽉 쥐어요. 자, 다시 쥐어봐요." 송헌은 힘줘서 선향의 손을 쥐었다.
"좋아요. 이거예요" 선향의 눈가가 아침해를 받아 빛났다.
"배 불러요?" 선향이 말했다.
"네 배불러요. 든든합니다. 고마워요. 아침." 송헌이 말했다.
"이제 도서관에 가야 해요."
"내가 차까지 바래다 줄게요." 선향이 유니폼 카디건을 걸치며 말했다. 선향은 송헌에게 다가가 살포시 팔짱을 꼈다. 송헌은 선향의 왼손을 잡아 끌어당겨 품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서 둘은 깍지를 꼈다. 앙상한 선향의 손과 두툼한 송헌의 손은 그렇게 조화로웠다.
송헌은 구름 도서관에 도착했다. 차에 잠시 앉아서 지난 24시간을 떠올렸다. '나는 24시간 전 충동적으로 강원도 해변으로 향하는 기차에 탔었고, 해변가에서 선향을 만났지. 선향은 기차역 난로가에서 나의 젖은 노트를 같이 말려줬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지. 선향의 집에 가서 우리는 라면을 끓여 먹었고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했지... 그리고'
송헌은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서가로 향했다. 서가에 오늘은 열람객이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했다. 오후 3시에 카페 일을 마치고 선향이 도서관에 찾아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송헌은 선향이 보고 싶었다. 문득 녹은 눈으로 질퍽해진 주차장의 바닥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눈이 한 뼘이나 쌓인 나뭇가지들은 아름다운 수묵화 같았다. 송헌은 일상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던가라며 의아해했다. 지하 서가로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 송헌을 보는 다른 사람들도 의아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향은 지난시간을 떠올려보려다 관뒀다. 그냥 계속 웃음이 났다. 누군가에게 아침을 차려준 게 가족들이 허망하게 떠난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아침을 맛있게 먹던 송헌의 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우적우적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선향은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파트너 룸에서 거울을 보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왔다. 그나마 일이 손에 익어서 눈감고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테이블을 치우는 내내 송헌만 떠올랐다. 종종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근무 수칙상 휴식시간에만 폰을 만질 수 있었기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송헌과 외모가 비슷한 머리 크고, 다리 짧고, 배 나온 사람이라도 카페에 들어오면 괜히 한 번씩 돌아봤다. 오후 3시에 도서관으로 찾아갈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선향은 저녁에 어떤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했다. 평소와 달리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렀다.
구름 도서관에서 집으로
선향은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후 3시가 되자마자 다음 근무자에게 매니저 배지를 넘기고 선향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유니폼 위에 패딩만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일요일 오후의 도로 위에 차들이 적었다. 택시가 금방 잡혔다. 택시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송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가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송헌에게서 곧바로 전화가 왔다.
"지금 끝났어요?"
"네 지금 가고 있어요. 그런데 근무 시간에 이렇게 전화해도 돼요?" 선향은 약간 숨을 고르고 말했다.
"네 괜찮아요. 열람실에 사람이 있으면 통화하기 좀 곤란한데 아침부터 쭈욱 저 혼자 있었어요." 송헌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 다 왔어요. 정문이에요"
"여기 어딘지 아세요? 지하에 있는 고서 자료실인데"
"네" 선향이 대답했다.
선향은 고서 자료실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한 번에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반투명 유리문을 열고 선향이 들어왔다. 송헌은 아까부터 일어서 있었다.
"우와~ 여기가 송헌씨가 일하는 곳이네요" 선향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네, 여기에는 고문서와 고서 들을 소장하고 있어요." 송헌이 말했다.
"책 냄새가 좋아요."
"이리 와보세요 보여줄게 있어요." 송헌은 선향은 데리고 둥근 원반형 손잡이가 옆에 붙어있는 이동식 책장 앞으로 갔다. 손잡이를 돌리니 천장에 닿을 듯이 높고 거대한 크기의 책장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움직였다.
"여기에 있는 책들은 100년도 더 된 책들이에요."
"우와... 페이지를 실로 하나하나 동여맸어요!"
"네, 이 책들 속지는 두 겹이 한 장이에요. 이것 보세요" 송헌은 책을 넘기며 선향에게 보여줬다.
"정성이 많이 들었겠어요."
"네, 종이마다 기름을 먹이고 밀랍을 녹여서 입히기까지 했어요. 정성이 대단하죠?"
"네, 그래서 100년 된 책 같지 않아요. 마치 새 책 같아요."
송헌은 선향이 들고 온 커피를 봤다. "커피 만들어 오신 거예요?"
"네, 겨울 오후 3시에는 부드러운 거품의 카푸치노가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
"오 선향 씨 센스 있어요. 식기 전에 우리 같이 마셔요"
"송헌씨 그런데 이 책들 모두 읽었어요?"
"하하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송헌이 말했다. 송헌은 카푸치노를 마시기 좋도록 포장을 열어줬다.
이때 열람실에 노 신사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송헌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오 송 선생 안녕하셨나?"
"오늘도 열하일기 가져올까요?"
"응 그래 주겠나? 고맙네"
송헌은 능숙한 솜씨로 이동식 책장을 서너 개 밀어내고 책을 꺼내 교수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선향이 교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 그래요 반가워요. 먼저 인사를 해주니 고맙구려. 송 선생이랑 잘 아는 사이인가?"
"네 오늘부터 같이 살기로 했어요" 교수가 송헌을 바라봤다. 송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이구 축하하네 송 선생 드디어 결혼하는 건가?"
"네? 아..." 송헌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선향이 끼어들었다.
"네, 좀 지내보고 나쁜 사람이 아니면 한 번 살아보려고요."
"아, 네. 네." 송헌이 말했다.
"이거 축하하네. 날짜 잡으면 알려주게나 내 꼭 참석하고 싶다네"
"교수님이 주례 봐주세요" 선향이 말했다.
"그것도 좋지. 허허. 미안하지만 나는 여기 문 닫기 전에 열하일기에서 찾아볼게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네. 축하 허네 송 선생. 주례에 대해서는 전혀 부담 갖지 말게나." 교수는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책을 몇 장 넘기더니 노트에 빼곡히 한자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선향은 까치발을 들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송헌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송헌은 잠시 놀랐지만 선향의 손을 들어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가끔씩 눈을 바라보기도 하고,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도 나눴다. 손은 여전히 꼭 잡고 있었다. 노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책장을 넘겼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오후 6시가 됐다. 노 교수와 간단히 목례를 하고 송헌은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밤이 물들어 있는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며 선향과 송헌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은 눈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거리의 불빛이 수채화처럼 두 사람을 빛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축복이었다.
따뜻한 차에 들어오자 선향의 쌍꺼풀이 짙어졌다.
"집으로!" 선향이 눈을 감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좀 자요. 24시간 넘게 잠 한 숨 안 잤어요. 우리." 괜찮다며 버틸 거라고 말하다가 선향은 곧 잠들었다. 송헌도 밀려오는 잠 때문에 이따금씩 아찔함을 느꼈다. 잠든 선향에게 겉옷을 덮어주고 운전석 창문을 내려 찬바람을 들였다. 잠이 금방 달아났다.
만두 가게에 잠시 차를 세웠다. 왕만두를 두 개 구입했다. 연잎을 덮고 쪄서 만든 만두라서 연잎 향이 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받아 들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선향이 깨어있었다.
"우와 연잎 만두집이네요. 저도 여기 좋아해요."
"네, 연잎 향이 좋아서 자주와요. 고기 만두 샀는데... 괜찮아요?"
"저도 고기만두밖에 안 먹어요. 여기 김치만두는 너무 매워요" 선향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저도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좋아요" 선향이 엄지를 척 세우며 좋아했다. 송헌도 엄지를 세우며 화답했다. 선향도 송헌도 서로 입맛이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산한 거리 위 만두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저기... 아직은 안돼요" 선향이 엘리베이터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말했다.
"네? 뭐가요?" 송헌이 말했다.
"한 이불 덮고 자는 거요..." 선향은 젖어있는 엘리베이터 바닥을 바라봤다.
"네? 아..."
"저는 저항할 수 없었어요... 한 손 만으로 저는 제압당했어요. 저는 저항할 수 없었어요... 마구 달려들면 안돼요. 저는 또 저항할 수 없을 거예요..." 선향은 말끝을 흐렸다.
송헌은 선향의 짙어진 쌍꺼풀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꽈악 끌어안았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송헌은 가슴이 먹먹했다. 선향의 작은 어깨를 뒤에서 양손으로 꽉 감싸 잡았다.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요"
송헌은 목이 메였다.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 위, 식탁 위, 바닥에까지 책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송헌은 멋쩍어하며 늘 '외출'로 되어있었던 보일러 스위치를 '난방'으로 맞췄다. 보일러가 이제야 제때를 만난 듯 웅웅 거리며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