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신의 책이예요

by 글담

저는 당신의 책이예요.

오늘은 '노란 불빛의 서점' 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은지 49일이 되는 날이었어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어요.

오전 11시 40분 쯤 이었어요. 짙은 쪽빛 원피스를 입은 앳된 분이 저를 살펴봤어요. 제 얼굴을 보고 뒷모습도 봤어요. 제가 그렇게 이쁜 얼굴은 아닌가봐요. 흘끗흘끗 대충보고 뒷모습만 뚫어지게 보더라고요. 스르륵 훑어보시고 향수 책이 놓여 있는 서가로 가셨어요. 그분의 오른쪽 엄지 손가락 끝에서 꽃 향기가 났어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향수가 있대요. 향수 이야기를 담고있는 책 친구가 들려줬어요. 그 친구랑 오래 이야기 하지 못해서 아쉬워요. 여기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바깥세상으로 나가버렸어요.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는 종이 봉투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말했어요. "종이 냄새 죽인다!" 환호를 지르더라고요. 그리고 영영 볼 수 없었죠. 그때까지 저는 한번도 종이 봉투에 담겨본 적이 없었어요.

"부럽다..." 하던 그때였어요. 그때 당신이 나타났어요. 검은색 양복이 잘 어울렸어요. 수염도 좀 가뭇가뭇하고 머리도 좀 헝클어져 있었지만 꽤 잘생기셨어요. 조금 맘에 걸리던게 당신의 어두운 표정이었어요. 저도 가끔 그런 표정을 지어봐서 아는데요. 슬픔을 참고 있는것 같았어요. 제 얼굴부터 확인하셨잖아요. 기억 나세요? 저도 당신을 바라봤어요. 당신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던 걸 그때 알았어요.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저를 들고서 그대로 계산대로 가시더라구요! 세상에!! 저는 옆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할 겨를도 없었어요.

카운터로 가는 내내 당신 표정을 살펴봤어요. 다른 친구들이 카운터로 가는 모습을 제가 많이 관찰해서 잘 알아요. 대부분 기분 좋은 표정이었거든요. 당신은 저를 만나서 기쁘거나 맘에 드는 표정이 아니었어요. 저를 내려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더라구요. 제가 발이 있었으면 아마 동동 굴렀을거에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갔어요. 저는 세상 구경을 이때 아니면 못하잖아요. 그러나 종이 봉투 안이라 세상을 볼 수 없었어요. 대신 열심히 소리를 들었어요. 도착한 곳은 산 속 이었어요. 숲속의 향기와 찬란한 녹음이 황홀해서 정신을 잃을뻔 했어요. 말없이 한참을 걸으시더라고요. 저는 가는 내내 흥분을 감추기 힘들었어요. 드디어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 생각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제가 도착하자마자 여러사람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이유가 궁금했지만 곧 이야기를 들려드려야하니까 저는 매무새를 꼼꼼히 매만지고 있었어요. 제 얼굴에 포스트잇을 붙이셨잖아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어요. 매무새가 좀 헝클어졌지만 아무렴 괜찮았어요. 저는 당신의 책이잖아요. 하얀 천 위에 살포시 놓아주셨어요. 누워서 위를 보니 당신과 닮은 분들이 빙 둘러 싸고 저를 바라봤어요. 저는 부끄럼이 많아요. 눈을 둘 곳이 없어서 아까 그 포스트잇에 있는 글자를 하나씩 읽었어요.

"엄마...미안해
엄마가 읽고 싶어하시던
책을 이제야 드리네요...
미안해 엄마."

아...그때서야 모든걸 이해했어요.
저는 이제 묻히는 거죠?
제 이야기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글을 썼어요.

아 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여자의 일생" 이에요.
어머니께 제 이야기를 오래오래
들려드릴게요. 아무 걱정마세요.
괜찮다면 저를...기억해주세요.
저는 언제나 당신의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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