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을 짓는 두 가지 방식
나는 유독 시인들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시어를 유창한 외국어처럼 구사할 줄 아는 시인의 일상은, 생활인의 루틴과는 다른 공기가 감돌 것이라고.
에세이에서는 시인의 언어가 보다 담담해짐을 느끼는데, 그 개성적인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상은 고통마저 깊이를 부여한다.
두 시인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단어의 집'을 짓는다.
두 시인의 언어가 특별한 이유는, 평범한 단어에 평범한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공감대를 쌓기 때문이다. 무색무취의 단어에 경험이 녹아들면, 시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인의 에세이에서 깨닫는다.
시인답게 '단어'에 고유한 일상의 의미를 불어넣은 이 에세이집을 통해, 나는 그의 기억 속으로 소환되고, 또 나의 세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안희연의 세계는 호기심을 연료로 움직인다.
그녀는 스스로를 단어 생활자라 칭하며, 세상에 흩어진 낯선 단어들을 수집하는 탐험가처럼 보인다. 산문집의 재료는 '적산온도', '내력벽', '불리언' 등.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건조한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무색무취 단어들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자신의 경험으로 '정체성의 사전'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AI 머신러닝'을 설명하는 '불리언'이라는 단어에 대해, 드라마 '스타트 업'(수지와 김선호 출연)의 서사를 끌어온다. 극 중에서 프로그래머인 남자가 여자에게 AI 머신 러닝의 개념을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남자는 AI 머신러닝을 '타잔이 제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꽃도 주고 과일도 주며 학습하는 과정'에 비유하여 무지한 여자를 배려한다, 그리고 여자는 감탄한다.
"그것 참 낭만적인 기술이네!"
이렇게 효율과 기능의 언어에 감성과 서사를 불어넣어, 전문어가 가진 본연의 규격을 비틀어 버린다.
또 '규모'는 '규격'과 달리 확장 가능성을 품은 단어로 남다름을 부여하기도 하고 (『단어의 집』, 20쪽),
윤동주가 별을 세지 않고, 별을 헤아린 이유(『단어의 집』, 38쪽)에 대해 해석해 보기도 한다.
자신만의 '단어 해석기'로 사전적 의미가 주는 통념을 뒤집을 때, 우리는 평범한 세상을 조금 더 유쾌하게 살만한 하나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박준의 세계는 그리움을 재료로 지어진다.
그의 언어는 사전이 아닌 기억 속에서 길어 올려져 있었다. 그분의 시집에서는 유독 '미인', '병', '슬픔'이라는 시어로, 사라진 시간과 사람, 그리고 그 안에 머무는 감정을 애틋하게 복원한다.
하지만 그의 문학을 개인적인 추억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오판이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리라는 그의 믿음은, 흩어진 개인의 슬픔을 공동의 온기로 바꾸어낸다.
그는 '어떤 말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라고 믿기에, 말 한마디의 무게를 신중하게 고른다. 유서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떠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을 기록하며, 애도마저 정치화된 세상에 조용한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문학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형태의 위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의 단어의 집은 화려하고 강하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잠시 기대어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놓고 함께 울 수 있는 다정함이 있다.
단어가 개인의 서사를 품는 그릇이라면, 한 시대의 언어는 그 세대의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다.
단어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세대와 집단마다 언어가 어떻게 생겨나고 변주되는지를 포착하는 즐거움을 알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요즘 애들 말'을 아는 차원을 넘어, 그 언어에 담긴 시대정신과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한때 라면 먹고 갈래?로 통용되었던 '썸'의 문법은"넷플릭스 보고 갈래?, 고양이 보고 갈래?로 진화했다. 이는 90년대 영화 <봄날은 간다>라는 하나의 거대 서사가 공유되던 시대에서, 개인의 취향(OTT 서비스, 반려동물)이 중심이 되는 파편화된 현대의 문화 지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과거의 획일적인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이 관계 맺기의 중요한 매개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분석한다. (출처: 주간조선, "라면 먹고 갈래? 이젠 넷플릭스 보자!", 2022.05.13.)
언어유희의 방식 또한 세대를 거치며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싸이월드를 추억하는 나의 세대에 '당근이지'라는 말을 일상어처럼 썼다면, Z세대는 '어쩔티비'라는 일상어를 농담처럼 기성세대에게 던진다. 이는 짧은 영상 콘텐츠(숏폼)에 익숙하며, 길고 복잡한 논쟁보다 즉각적이고 유희적인 소통을 선호하는 Z세대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예능에서 유래된 '손민수하다'(타인의 옷이나 물건을 따라 사는 행위) 같은 단어는 이제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 등재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이는 웹툰, 아이돌 팬덤 문화 같은 특정 하위문화(Subculture)가 이제 사회 전체의 언어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증명한다.
시대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서, 한 세대의 욕망과 문화를 먹고 자라며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이러한 언어의 변천사를 읽어내는 것은, 안희연 시인이 낯선 단어의 계보를 탐험하고 박준 시인이 기억 속의 말을 길어 올리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대를 살아내며 자신만의 사전을 채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두 시인은 세상을 향해 자신만의 언어를 던진다. 한 명은 지적인 호기심으로 세계의 법칙에 균열을 내고, 다른 한 명은 내밀한 그리움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리를 놓는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들은 평범한 단어에 고유한 경험을 투영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예술가이며, 세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파편이다. 그들의 에세이를 읽고 나면, 나 역시 주변의 단어들을 다시금 헤아려보게 된다.
무심코 쓰던 나의 단어들로, 나만의 작은 집을 짓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 삶이 규모가 아니라 규격을 지향한다면 숨이 막혀 하루도 못 살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물리적 규모보다는 정신적 규모의 확장을 위해 삶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20쪽)
효율과 표준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삶의 방향을 '규격'이 아닌 '규모'로 설정해야 한다는 통찰이 인상적이다. 정신적 세계의 확장을 지향하는 작가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문학은 손쉽게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판별하는 시스템에 딴지를 건다." (218쪽)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명쾌하게 정의한 문장이다.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문학의 힘을 믿게 한다.
(안희연, 『단어의 집』, 한겨레출판, 2021)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18쪽)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꼭 울음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일부러 시작할 수도 없고 그치려 해도 잘 그쳐지지 않는"(70쪽)
: 내가 건네는 말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평생 살아남을 유언이 될 수 있다는 성찰은, 일상 언어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갖게 한다.
"내일 아침빛이 들면 나에게 있어 가장 연한 것들을 당신에게 내어 보일 것입니다. 한참 보고 나서 잘 접어두었다가도 자꾸만 다시 펴보게 되는 마음이 여럿이었으면 합니다."(83쪽)
"시를 짓는 일이 유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아마 이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고 이 숱한 사라짐의 기록이 내가 쓰는 작품 속으로 곧잘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그래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 세상에서 우리는 잘도 살아간다."(189쪽)
: 개인의 슬픔을 사회적 아픔으로 확장시키는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외면하기 쉬운 타인의 고통을 문학의 언어로 기록하며, 독자에게 묵직한 질문과 책임감을 던진다.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난다, 2017)
별점: ★ ★ ★ ★ ☆(4.0/5.0점)
추천 이유 : 삶을 시처럼 살 것 같은 시인들의 일상이 궁금할 때. 평범한 언어에 평범한 일상을 투영하는 것만으로, '단어가 시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