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도덕의 법정에 세울 수 있는가? :
Somerset Maugham, 'The Moon and Sixpence'
여기, 인류의 문화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끝나지 않은 재판이 열렸다. 피고석에는 늘 당대의 가장 문제적인 예술가들이 앉아왔고, 검사와 변호인은 세기를 거쳐 같은 논쟁을 반복한다.
"타락한 예술은 무가치한가?"
이 영원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사건 파일을 뒤적이지만, 모든 논쟁의 시작과 끝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원형, 가장 압도적인 증거 기록은 바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다. 이제 우리는 이 낡고 두꺼운 사건 파일을 다시 펼쳐, 피고인 찰스 스트릭랜드와 함께 최후 변론을 시작해야 한다.
변호인 측 주장의 핵심은 '예술의 독립성'이다. 예술은 도덕이나 상식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라는 변론이다. 스트릭랜드는 이 주장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가장 완벽한 증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그린다. (그러나 그의 뮤즈는 세간의 도덕 바깥에 존재했으니, 금기를 넘는 쾌락과 자극이었다.) 그의 외침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절규에 가깝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오? 우선 헤어나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빠져 죽어요." (69쪽)
(윌리엄 서머싯 몸 Somerset Maugham,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민음사)
이는 19세기 프랑스를 휩쓴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광적인 실현이다. 실제로 그의 모델인 폴 고갱은 "문명은 당신을 병들게 하고, 야만은 당신을 회복시킨다"고 믿으며 타히티로 떠났고, 그곳에서 서구 문명의 도덕률을 비웃는 걸작들을 남겼다(출처: a-r-t.com, "Paul Gauguin and Primitivism", 2023.11.05.). 스트릭랜드에게 가족에 대한 책임, 타인의 시선, 사회적 의무 같은 '6펜스'들은 그의 '달'을 가리는 성가신 먼지에 불과했다. 이 법정에서 변호인은 주장한다. 그의 삶이 추했기에 그의 예술이 위대했으며, 그 둘을 분리할 때에만 우리는 작품이 뿜어내는 경이로운 빛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고.
그러나 검사 측의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예술이 인간의 산물인 이상, 그것이 탄생한 '맥락'과 그것이 초래한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 우리는 역사라는 또 다른 증거 기록을 펼쳐야 한다. 일제강점기 자의든 타의든 식민 지배의 논리를 정당화 했던, 걸출한 문인들의 행적이다.
서정주의 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이 '친일'이라는 역사적 맥락에 복무했을 때, 우리는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할 수 있는가? 한 독자가 "누군가의 고통을 전제로 한 쾌락이라면 누구도 웃어서는 안된다"고 일갈했듯, 예술이 타인의 존엄을 짓밟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미(美)가 아닌 폭력의 일부가 된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친일 예술인의 작품을 두고 수년째 전시와 철거 논쟁을 반복하는 현실은 이 문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상처임을 증명한다. 결국 우리는 '예술가의 원형'인 스트릭랜드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의 예술에 감탄하면서도 결코 그의 삶에는 동조할 수 없는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딜레마는 현재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한국 대중문화도 빗겨갈 수 없다. 환각과 쾌락에 빠져 한때 팬들을 충격에 빠뜨린 한국 대중 음악인, 세계적 찬사를 받고 있지만 불륜이라는 개인사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영화인들... 우리는 규율을 벗어난 세계관이 빚어낸 예술, 그 날것의 에너지가 주는 몽환적인 질주감에 열광할 수 밖에 없다. 반면 타인의 고통 위에서는 결코 춤출 수 없다는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는 스트릭랜드에게는 없는 바로 그 '모순'과 '내적 갈등'이야말로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보루일지 모른다. 《달과 6펜스의 위대함은 이처럼 우리 안의 균열을 들여다보게 하고, 예술과 도덕이라는 불편하지만 영원한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워놓는다는 점에 있다.
최후 변론은 끝났다. 판사(작가)는 침묵하고, 배심원(독자)은 혼란에 빠진다. 이 법정은 유죄도, 무죄도 선고하지 않는다. 다만 스트릭랜드의 추한 삶과 그의 위대한 예술이라는 모든 증거를 남김없이 펼쳐 보인 채 우리에게 판결을 위임한다. 당신의 내면 법정은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달과 6펜스》는 한 세기가 넘도록 이 질문을 던져왔고, 앞으로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 지독한 괴로움이야말로, 이 책이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를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마음속의 경찰관이며... 자아의 성채 가운데의 스파이이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노예가 되는 것이다." (77쪽)
"작가는 자신의 작가적 본능이 인간의 기이한 특성에 몰두하는 나머지 도덕 의식까지 마미됨을 깨닫고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 행위들에 대해서 반감을 느끼기 보다 그 행위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작가는 논리를 철저히 갖춘 악한을 창조해 놓고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일이 될 지라도 그렇다. 셰익스피어도 이아고를 고안해 냈을 때, 달빛과 상상의 실을 짜 데스데모나를 상상해냈을 때 느끼지 못한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작가는 악당을 만들어내면서 내면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닐까? "(197쪽)
(윌리엄 서머싯 몸 Somerset Maugham,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민음사)
우리가 선(善)의 근원이라 믿는 '양심'을, 개인을 묶어두는 '경찰관', '스파이', '사슬', '노예'의 굴레로 묘사하는 이 문장은 지나치게 부도덕한 가치관은 아닌지 의심케 한다. 그것은 우리가 왜 스트릭랜드처럼 될 수 없는지에 대한 가장 명료한 해설이다. 우리는 이 내면의 경찰관 때문에 타인을 의식하고 사회와 타협하며 살아간다. 스트릭랜드는 그 경찰관을 살해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달'을 향해 떠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인간성과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자유 사이에 놓인,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실감하게 한다.
별점: ★ ★ ★ ★ ★(5.0/5.0점)
추천 이유 : 예술과 예술가의 가치에 대한 서사의 원형. 어떤 예술관도 아류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예술과 도덕' 논쟁의 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