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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시선: 김훈,『칼의 노래』

영웅의 맨얼굴을 들여다 본다는 것

by 여기반짝

역설의 미학을 타고 영웅의 심연 속으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현대문학, 2012)


『칼의 노래의 첫문장이다. 이상한 일이다. 피와 죽음과 절망이 예고된 전쟁 소설의 첫머리에서 마주한 것이 하필 '꽃'이라니. 이 문장은 아무런 맥락도, 설명도 없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난해함 사이, 생각의 틈이 벌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400여 년 전 남해의 어느 바다, 한 장수의 고독한 시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소설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이런 낯선 멈춤의 연속을 경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문장들은 역설이라는 불친절한 문법으로 장면을 묘사했으나,그리하여 상황을 여러번 곱씹을 수있었고, 김훈 작가만의 문체에 매료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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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김훈, 『칼의 노래』 현대문학, 2012)



길삼복은 강력한 헛것이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있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들의 살기는 찬란했다.

(김훈, 『칼의 노래』 현대문학, 2012)


이 역설적인 문장들 앞에서 아마도 독자들은 여러번 나아가기를 멈추었을 것이고, 이는 단순한 활자 읽기를 깊은 사유의 체험으로 바꾸엇을 것이다.


역사의 변형으로 감행한 실존적 진실


작가는 '충(忠)'이나 '의(義)' 같은 상투적인 단어로 이순신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는 '칼'의 서늘한 감촉과 '울음', 그리고 진영에 가득 찼을 '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 같은 원초적 감각으로 표현한다. 이건 머리로 이해하는 역사가 아니다. 코로 냄새를 맡고, 피부로 추위를 느끼며, 온몸으로 그 시대를 통과하는 감각적 체험에 가깝다.


작가는 역사적 사실(fact)의 행간에 문학적 상상이라는 '왜곡'을 감행함으로써, 오히려 그 시대의 맨얼굴, 즉 실존적 진실에 가닿는다. '성웅 이순신'을 신화의 박제단 위에서 끌어내려, 우리와 똑같이 먹고, 고뇌하며,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 되살려낸 것이다.단순한 역사 왜곡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복원 작업이다.



이순신을 극한으로 내몬 건


그런데 이토록 서늘하고 아름다운 필력은 대체 무엇을 말하기 위함이었을까. 문장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순신의 신화적인 승리에 열광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를 그런 극한의 상황으로 내몬 '시스템의 실패'를 고발하고 있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순신의 고독이 빛나는 이유는, 그가 위대한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무능한 조정과 외부의 적 사이에서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무력한 시스템의 피해자이자 백성들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영웅이라는 왕관의 무게


『칼의 노래』는 우리에게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의 조건같은 손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붕당의 갈등 속에서 사찰단이 제시한 진실 앞에서도 자신과 정치색이 다르다면 무조건 배척하던 시기에 "조정의 판단이 과연 최선이었는가?", "한 개인에게 모든 짐을 지우는 공동체는 정당한가?" 와 같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트럼프발 국제 정세의 안개 속에서, 혹은 예측 불가능한 전쟁의 암운 앞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400년 전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소설은 과거의 영웅의 화려한 승리담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격려하는 대신, 책임의 무게란 얼마나 무겁고도 외로운 것인지 영웅의 고독한 심연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우리들의 노고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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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인간의 뒷모습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첫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인간의 전쟁과 무관하게 피고 지는 꽃의 무심한 아름다움. 그것은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을 묵묵히 지켜본 역사의 시선 그 자체일지 모른다. 『칼의 노래』를 읽는다는 것은, 그 무심한 시선 아래에서 리더의 짐을 지고 있는 한 인간의 맨 얼굴을 직접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 숭고한 여운은, 새로운 역사의 영웅이 나고 지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인상 깊은 구절과 이유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나는 정치적 상징성과 나의 군사를 바꿀 수는 없었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 술취한 선전관으로부터 길삼봉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길삼봉은 임금 자신일 것이었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죽어지고 살아지기를 바랐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

(김훈, 『칼의 노래』 현대문학, 2012)


왕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리더의 모습이 핍진하게 드러나있어,

강인한 그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평점 및 추천 이유


별점: ★ ★ ★ ★ ☆ (4.5/5.0점)


추천 이유 : 예술과 왜곡 사이의 예민한 틈 사이로 걸작을 탄생시킨 김훈 작가의 필력에 감동했다. 국제 사회의 어지러운 변동성을 온몸으로 견디며 진정한 리더십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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