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도 학습이 되나요?
현실의 문을 열고 평행 세계에 빠져드는 이야기에 매료된 적이 있다. 내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그런 소설이었다. 하루키 매직에 빠져, 총 3권에 달하는 장편을 하루 종일 읽다가, 출근 생각에 안타까워하며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그마저도 아쉬워 눈 뜨자마자 읽을 생각에 머리맡에 두고 잔 적이 있는 소설이었다.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고, 현실의 질서가 미묘하게 뒤틀린 세계. 그 기묘하고도 거대한 서사 속을 헤매다 보면 마음 한편엔 늘 거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대체 이 작가의 머릿속에는 어떤 세상이 들어 있기에, 이토록 불가사의하고도 매혹적인 상상을 펼쳐낼 수 있을까?
그 오랜 호기심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루키의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펼쳤다. 나는 아마도 창작의 비밀이 담긴 매뉴얼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이 들려준 하루키의 고백은 지극히 의외의 것이었다. 그의 상상력의 원천은 번뜩이는 영감이나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외로 ‘성실함’, 바로 ‘직업’으로서 글쓰기를 대하는 한결같은 태도였다.
“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 200자 원고지 20매 쓰기를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 ‘매일 시간을 정해 책상 앞에 앉아 집중해서 일을 한다, 그래서야 샐러리맨이나 공장 노동자나 마찬가지 아니냐’라고 혹자는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왜 예술가가 아니면 안 되느냐, 대체 누가 정했는가,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Murakami Haruki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마치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 도장을 찍는 직장인처럼, 그는 자신을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 세워두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내가 사랑한 그 기묘한 이야기들이, 성실과 규칙이라는 재미없는 이름보다는 낭만과 우연의 이름이길 바랐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고백은 실망이 아닌 깊은 감동과 존경심으로 바뀌어 갔다.
그의 성실함은 초현실적 상상력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깊은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튼튼한 ‘생명줄’이었다. 하루키는 소설 쓰기를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행위’에 비유했다. 그 어둠 속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자칫 길을 잃거나 상처 입기 십상인 곳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깊은 어둠에 대항하려면, 다양한 위험에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Murakami Haruki,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그 순간, 그의 달리기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단순한 건강 관리가 아니라, 어둠 속을 탐험하기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훈련이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쓰는 것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기 위한 마라토너의 페이스 조절과도 같았다. 그의 소설 쓰기는 어쩌면, 예측 불가능한 무의식의 풍경 속을 홀로 달리는 기나긴 마라톤이었을 것이다. 하늘에 뜬 두 개의 달과 말하는 고양이, 우물 속의 기묘한 세계는 그 고독한 레이스 중에만 마주칠 수 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하루키와 일종의 대화를 거듭하다 보니 ‘천재’라는 단어 뒤에 가려져 있던 한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신비한 예술가가 아닌, ‘뚜벅뚜벅 걸어가는 직업인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재능이 아니라 매일 하루하루의 노력으로 쌓아 올렸다’는 그의 고백 앞에서, 나는 작가 하루키에 대한 존경심을 품기 되었다. 파괴적인 삶 속에서 영감을 찾는다는 낡은 신화 대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꾸준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예술가의 모습을 그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리티란 결국 ‘다른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준에서 일부러 벗어나려는 자세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나라는 인간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 좀 다르다,라고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다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아닐까요.”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결론이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어쩌면 이건 나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서 다시 생각해 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롭게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180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요."
“트집 잡힌 부분은 어떻게든 고친다, 이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비판의 내용에 수긍할 수 없어도 어쨌든 고칩니다. … 읽은 사람이 어딘가에 트집을 잡을 때는, 그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문장의 흐름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아무튼 거기서 턱 막힌다는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Murakami Haruki,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별점: ★ ★ ★ ★ ☆ (4.5/5.0)
추천 이유 : AI 시대에 인간다움을 고민하며, 상상력의 원천을 찾고자 한다면 읽어보시라. 그리고 당신은 하루키에게 상상 외의 답변을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