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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시선: 홍성수,『말이 칼이 될 때』

표현의 자유를 업데이트할 시간

by 여기반짝


집단의 언어는 현실을 바꾼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이는 거짓이라도 여럿이 반복하면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말의 힘을 경계한 비유다. 우리 선조들 역시 집단의 말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가락국 시조 신화 속 「구지가(龜旨歌)」는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으라’는 백성들의 노래로 왕을 강림하게 한, 말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집단 언어의 힘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차별’과 ‘배제’라는 이름의 칼이 되는지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에세이였다.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액을 덜기 위해 목욕하고 술을 마시던 계욕일에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2, 3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사람 소리는 있는 것 같으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하는 말소리만 들렸다. 구간 등이 "우리들이 있습니다." 하자, "내가 있는 데가 어디냐?" 하였다. "구지입니다." 하자, 또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돼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서 모으면서 노래하여라.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어라 / 내어 놓지 않으면 / 구워서 먹겠다"

구간 등이 그 말대로 즐거이 노래하며 춤추다가 얼마 후 우러러보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급함을 싼 것이 있었다.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있는데 태양처럼 황금빛으로 빛났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 기뻐하며 백 번 절하고 다시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갔다. 책상 위에 모셔 두고 흩어졌다가 12일쯤 지나 그다음 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 개가 모두 남자로 변하였고, 용모가 매우 거룩하였다. 이어 의자에 앉히고 공손히 하례하였다.

(일연, 『삼국유사』권 2 가락국기)



공존의 조건을 파괴하는 것


저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혐오’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혐오’를 명확히 분리한다. 책에서 말하는 혐오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 배제하려는 태도'(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존재를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지워버리려는 의지를 담은 ‘행위’에 가깝다.

혐오 표현이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의 본질은, 개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존 조건의 파괴’에 있다.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는 그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며, 이는 공동체의 기반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이다. 혐오 표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상처받은 감정을 보호하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지키는 적극적 행위다.



혐오 표현과 가짜 뉴스의 불편한 콜라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혐오 표현의 형태도 진화하고 있다. 단지 텍스트의 교묘한 재생산과 전파뿐 아니라 '딥페이크' 기술을 업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다. 2018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에 따르면 가짜 뉴스의 전파 속도는 일반 뉴스보다 6배나 빠르다고 한다.

'제러미 월드론(Jeremy Waldron: 뉴질랜드 철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혐오 표현 규제는 '포용의 공공선과 정의의 기초에 관한 상호 확신의 공공선을 지키는'(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2018)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혐오에 맞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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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가인권위원회



‘나’와 상관없다는 착각


어쩌면 우리는 ‘나는 소수자가 아니니 괜찮다’는 안일함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AI에 의한 특이점이 다가오는 현재, 그 누구도 영원한 다수일 수 없다. 기술의 발전 속에서 누구든 낙오자가 될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기준에 의해 새로운 소수자로 분류될 수 있다. 더구나 계층이 세분화되고, 비대면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타인으로부터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말이 칼이 될 때』가 던지는 가장 큰 울림은, 혐오와 차별을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 아닌, 언제든 내게 닥칠 수 있는 ‘미래의 위협’으로 재정의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공존의 조건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온전히 안전할 수 없다.



가장 이기적인 연대일지라도


혐오표현에 맞서는 것은 단순히 남을 위한 시혜나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소수자의 위치에 놓일지 모르는 ‘미래의 나’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일이다. 혐오의 문제를 남의 일로만 여기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곧 당신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이기적인 연대의 제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표현의 자유’라는 오랜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변화된 시대의 위협 앞에서 '혐오의 대상이 불변한다는 낡은 개념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모두의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그 개념을 ‘업데이트’ 해야 하는 것이다.




인상 깊은 구절과 짧은 생각


"결국 소수자들이 처해있는 불평등 맥락 때문에 혐오표현은 그 표현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혐오표현은 차별을 고착화한다... 듣는 사람에게 민감하다고 타박할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여 발언하는 게 윤리적으로 옳다."

"존 롤스의 정치 철학에 바탕해 질서 정연한 공정한 사회에서 각 개인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할지에 대한 확신에 있어야 한다. 혐오표현이 공존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 가치인 인간의 존엄, 평등,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어크로스, 2018)


많은 경우, 혐오표현에 대한 지적은 ‘프로불편러’의 예민함이나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치부되곤 한다. 하지만 문제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시선의 문제이며, 발화자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말하는 행위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으로 던져지며, 그 안에서 힘의 불균형을 만나 누군가에게는 흉기가 된다. 나의 발언이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그 무게만큼의 책임감을 갖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권 의식 출발점이다.



⭐평점 및 추천 이유


별점: ★★★★☆ (4/5점)

한 줄 추천: 표현의 자유를 정치적 이슈로 한정 짓는 사람들에게,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가는 모든 시민을 위한 의제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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