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주의에 빠진 자본주의 게임
『The 8 shws(더 에이트 쇼)shows(더 에이트 쇼)
제목: 더 에이트 쇼 (The 8 Show)
플랫폼: 넷플릭스 (Netflix)
원작: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게임>, <파이게임>
연출/극본: 한재림
등장 인물: 류준열(3층 역) / 천우희(8층 역) / 박정민(7층 역) / 이열음(4층 역) / 박해준(6층 역) / 이주영(2층 역) / 문정희(5층 역) / 배성우(1층 역)
주요 내용: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쇼에 참가한 8인의 이야기. 극단적인 계급 사회의 축소판.
게임의 룰!(출처: https://www.bizhankook.com/bk/article/27621)
‘더 에이트 쇼’는 사기를 당해 9억 원이라는 거액의 채무를 진 배진수(류준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최저시급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든, 줄 하나에 의지해 고층 건물 외벽을 닦든, 빚은 줄어들지 않고 이자도 갚지 못하는 인생이다. 결국 한강에 몸을 던지려는 그에게 의문의 메시지가 울린다. ‘안녕하십니까’ ‘당신이 포기한’ ‘당신의 시간을’ ‘사고 싶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탑승해 주세요’.
그렇게 의문의 게임에 참여하게 된 배진수는 8개의 숫자 중 3을 골라 3층에 배정된다. 쇼가 시작되면서 1분마다 3만 원이 쌓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시급으로 180만 원, 일당으로 4320만 원이다!
‘더 에이트 쇼’의 룰 자체는 간단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금이 쌓이고, 광장 전광판에 주어진 시간이 종료되거나 참가자 중 누군가 사망하면 쇼가 끝난다. 필요한 물품은 인터폰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단 가격은 시중가의 100배인 별도 물가로 책정되며, 구입한 물품은 방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오징어게임 시즌3을 정주행 한 후 허한 마음에, 찾게 된 넷플릭스 시리즈다.
참가자들이 하부 계급으로만 구성된 '오징어 게임'과 달리, '더 에이트 쇼'는 게임 안의 참가자들의 계급을 분류하여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이 특별했다. 보는 내내 불편함을 유발하도록 계산된 장치는 다분히 지적인 도발이었다.
이 시리즈를 보고 난 후의 감상은 명확히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절망적인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 무력감만 안기는 '리얼리즘의 함정'이라는 비판적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파헤치도록 유도하는 '고도로 계산된 지적 유희'라는 찬사다. 이 극단적인 평가의 간극이야말로, <더 에이트 쇼>의 본질을 짚어내는 포인트일 것이다.
이 쇼는 관객을 지적인 게임으로 초대하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 돈이 쌓입니다."
(『The 8 shows(더 에이트 쇼)』, 넷플릭스, 2024)
단순한 이 규칙은 곧이어 "개인의 사치품은 저렴하지만, 음식과 물 같은 공공재는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총시간에서 차감된다"는 교묘한 함정으로 완성된다. 이는 단순한 생존 게임의 룰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질문 그 자체다.
7층(박정민)이 초반에 제안하는 효율적인 시간 관리와 규칙 수립은 합리적 이성으로 사회를 운영하려는 테크노크라트의 전략을, 4층(이열음)이 시간과 비용을 계산하며 시스템의 허점을 파고들려는 시도는 정보와 지식으로 불평등에 맞서려는 지식인의 고군분투를 떠올리게 한다. 3층(류준열)이 "이건 그냥 바보들끼리 시간만 보내라는 게 아니에요. 뭔가 있을 거예요"라고 읊조릴 때, 우리는 이미 감독이 설계한 게임판 위에 올라섰음을 직감한다.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는 이 지적인 유희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뽑기로 선택한 계급의 가치관이 프로그래밍된 양 살아가는 것이다.
"억울하면... 너희도 8층에서 태어났어야지."
(『The 8 shows(더 에이트 쇼)』, 넷플릭스, 2024)
절망의 끝에서 1층(배성우)이 내뱉는 이 대사는 노력이나 능력이 아닌 출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세계의 잔혹한 본질을 꿰뚫는다.
"여긴... 쇼가 아니라 진짜 세상이었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
(『The 8 shows(더 에이트 쇼)』, 넷플릭스, 2024)
이 모든 지옥도를 겪어낸 3층(류준열)도 마침내 깨닫는다.
문제는 이 지적인 게임이 어느 순간부터 불쾌한 고문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폭력이 상징(시간 격차)의 영역에서 류준열, 박정민, 배성우 등을 향한 구타와 고문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부터 게임의 장르는 바뀐다.
특히 1층의 몰락 과정은 이 변곡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처음 그의 어릿광대 짓은 희비극적 연민을 자아냈지만, 쇼의 막바지, 상금에 대한 집착으로 광인이 되어 벌이는 그의 마지막 '공연'은 더 이상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시간이! 시간이 돈이라고!"라는 절규는 게임의 모토가 아닌, 한 인간이 파괴되는 단말마의 비명일 뿐이다. 이는 관객에게 '풀고 싶은 문제'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고통'을 안긴다. 지적인 유희가 자극적인 불쾌함으로 전락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결론적으로 <더 에이트 쇼>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모순을 상징이라는 장치로 품은 작품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해부하는 지적인 설계도에 감탄하면서도, 그 해부 과정에서 튀는 피와 살점에 감정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이는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관객의 나약함일 수도, 혹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과잉되어 그 메시지마저 집어삼켜 버린 연출의 한계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