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소년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
한강, 『소년이 온다』
까마득한 역사처럼 느껴지는 그 시간을 다루고 있지만, 마지막 장까지 넘긴 사람이라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도착한 날카로운 경고문이라는 사실을.
과거의 국가는 총칼과 검열로 진실을 통제했다. 오늘날의 보이지 않는 권력은 알고리즘과 필터 버블로 우리를 각자의 섬에 고립시킨다. 『소년이 온다』(Human Acts)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질문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교과서다.
소설 속 인물들이 도청으로 향하고, 총을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마음. 짓밟힌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가 있겠어."
(한강, 『소년이 온다』Human Acts, 창비, 2014)
한 등장인물의 이 독백처럼, 그들의 저항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이야말로 국가일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과 온기였다.
그렇다면 45년 전 그들의 용기와 연대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소설에 대한 작가의 말은 섬뜩할 정도로 현재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군중의 개개인 도덕성과는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발동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전자는 개인이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본다."
(한강, 『소년이 온다』Human Acts, 창비, 2014)
광장의 시민들이 보여준 '숭고한 군중'의 연대는, 오늘날 익명의 가면을 쓴 채 특정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야만적인 군중'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가짜뉴스가 진실을 흐리고, 알고리즘이 혐오를 증폭시키는 시대. 우리는 지금 어떤 군중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가? 공동체의 가치가 훼손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년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소년이 온다』(Human Acts)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소년은 45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있다.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이다.
"너는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소설의 첫 문장은 '나'가 아닌 '너'로 시작한다. 죽은 친구 정대의 영혼이 소년 동호의 행적을 따라가며 부르는 이 서늘한 호명은, 독자를 안전한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게 두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는 동호가 되어 그날의 거리를 걷고, 그의 공포와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된다.
동호 어머니의 넋두리
책 전반에 걸쳐 애써 담담하게 눌러왔던 감정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입을 통해 통곡처럼 터져 나온다. 아들의 제삿밥을 챙기며 쏟아내는 절절한 사투리 섞인 독백은, 역사의 비극이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파괴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도."
도청으로 다시 돌아가며 동호가 되뇌는 이 문장은, 이 책의 가장 무거운 질문을 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친구의 죽음을 외면해야 했던 소년의 자기혐오와 결단. 이는 단순한 복수심을 넘어, 인간의 존엄이 훼손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윤리적 고뇌를 보여준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별점: ★★★★★ (5.0/5.0점)
한 줄 추천: 시민 연대가 파편화되고, 빅데이터가 빅브라더로 변질될까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