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층으로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집은 창문을 열면 옆 건물의 누런 벽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여서 창문을 아무리 열어 봐도 다시 닫히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었다.
채광이라고는 오후 1시 즈음 30분 정도가 다였는데, 그마저도 햇빛이 아주 강한 날에만 드물게 들어왔다.
이번에는 월세가 10만 원 더 비싼 집이었다.
부동산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시자마자 눈이 투명해졌다.
벽 하나가 온통 창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창으로 투명한 하늘이 쏟아졌다.
투명한 것이 투명한 것을 지나쳐 눈 앞에 투명하게 다가왔다.
능숙한 세입자처럼 보이려 노력했지만, 그 광경을 보자마자 '와'하고 탄식이 나오는 촌스러움을 숨길 순 없었다.
어느 때보다 속전속결로 계약과 이사가 이루어졌다.
살고 있던 집의 계약이 십여 일 정도 남았었지만, 일찍 방을 빼기로 했다.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기엔 이미 방을 보고 나서 투명함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사를 한 다음 날 아침, 슬며시 눈을 떴는데 순식간에 내가 훨씬 밝은 방에서 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볕의 무늬를 보고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게 뭐라고 웃음이 났다.
자취를 한 이후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내 '하늘과 해도 돈을 주고 사는 거구나'하고 씁쓸했다.
내 방이지만 내 것은 아니고, 하늘과 해는 공유 자원이지만 공평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해가 듬뿍 들어오는 모양새와 온도가 좋아 최대한 블라인드를 올린 채 살아가고 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내려야 하고, 가끔은 건너편 건물의 옥상에서 사람이 쳐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더벅머리를 하고서도 최대한 위협적인 눈으로 쳐다보기도 한다.
하지만 월세 10만 원을 더 주고 산 그 하늘과 해를 놓칠 수 없어 그 수고로움을 다 참아내고 있다.
해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아무리 크고 밝아도 결코 닿지 못하는 집이 있다는 것을, 사실 그런 집이 더욱 많다는 것을 말이다.
모르고 있는 것이었으면 한다.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다는 건 일말의 희망도 포기하는 일이니까.
나는 여름밤 간간히 불어오는 찬 바람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속물이기도 하다.
많은 돈으로 하고 싶은 건 김애란의 단편 '입동'의 구절을 빌리자면,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블라인드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불편함에도 큰 창을 얻는 일처럼 말이다.
내가 집에서 쬐는 햇볕의 가격은 나이가 먹을수록 비싸져 갈 것이다.
때로는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햇볕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난 오늘도 블라인드를 힘껏 올리고 뜨거움을 참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