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루한(참배움연구소장)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그 해 7월 예조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교육 행정 기관인 학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895(갑오)년 2월 일본의 영향 아래 ‘조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만규가 ‘조선교육사’(1947)에서 이를 두고 ‘교육입국조서’라 이름 붙였다. 전통적인 도덕 교육에 지식 교육과 체육 교육을 보태 교육의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조정은 1895년 그 해 4월의 한성사범학교 관제와 7월의 소학교령(1906년 8월 보통학교령 이전까지)을 내렸다.
첫째, 세계의 부강한 나라는 모두 백성의 지식 수준이 발달하였으니, 지식을 깨우치는 교육은 국가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둘째, 교육에 있어서 실용에 힘쓰고, 독서나 습자로 옛사람의 찌꺼기나 줍고 시세에 어두워서는 안된다.
셋째, 오륜의 행실을 닦는 덕양(德養), 체력을 기르는 체양(體養),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양(智養)을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삼는다.
넷째, 널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르겠다.
불행히도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뒤로 세 차례의 ‘조선교육령’을 거치며 과거 일어라고 불리던 것이 당당하게 국어라 불리게 되었고, 국어라고 불리던 교과목은 조선어로 변천했으며 조선어를 외국어로 다루며 일어(국어) 습득과 황민화 정책의 보조 연장으로 여겼다.
[1911년 8월 23일에 공포한 1차 조선 교육령 시기(1911~1922), 2차 조선 교육령 시기(1922~1938), 3차 조선 교육령 시기(1938~1945)] * 표만들기
학교 교육은 일본 것을 본뜨고 흉내 내기에 그친 교육과정,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어’의 경우 1) 교과이름, 2) 주당 시간 수, 3) 교수요지, 4) 교과서를 살펴 볼 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한문 습득에 주력하면서 ‘외국어 1과’로 일본어를 가르쳤다.
一切植物은 그 種子의 好否를 因하야 發育이 懸殊지라. 土地를 深耕고 肥料를 多施지라도 種子가 不好면 結實이 良好치 못고…(빈칸은 하)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 권8)
위는 1906년 보통학교령과 함께 일본인이 편찬한 교과서의 글모습이다. 언젠가는 ‘한자-가나 섞어쓰기’의 글모습으로 바꾸겠다는 일제의 숨은 속셈을 엿볼 수 있다.
一切植物は その 種子の 好否を 因して 發育が 懸殊すゐから. 土地を 深耕して 肥料を 多施すゐけれども 種子が 不好すれば 結實が 良好しな くて…
(보통학교 학도용 국어독본 권8)
위에서 쓴 글은 중국 문화권의 한문글을 일본글인 ‘한자-가나 섞어쓰기’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보듯 일본글로 넘어 가기 전 ‘한자-한글 섞어쓰기’를 먼저 가르치고 이것을 징검다리로 하여 일본글 모습으로 바꾸는데 힘썼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