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은 산업이 아니라 신호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

저녁 9시, 동네 학원가의 불빛은 아직 낮 같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는 아이들이 보입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사교육은 선택이지.” 하지만 그 불빛을 오래 바라보면, 사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신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학교만으로는 불안하다’는 신호를 내보내면, 가정은 그 불안을 돈으로 번역합니다. 그렇게 사교육은 산업이 됩니다. 산업이 된다는 건, 개인의 결심으로는 끊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교육을 비난해도 소용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비교를 낳습니다. “남들은 다 한다는데…”라는 말은 욕심의 말이 아니라 생존의 말입니다. 문제는 그 생존이 ‘줄세움’의 틀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같은 시험을 치면 공정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시험의 난도가 오르면 학원은 더 필요해집니다. 시험의 비중이 커지면 내신도 사교육의 영역이 됩니다. 공정은 시험을 강화하고, 시험 강화는 사교육을 키웁니다. 우리는 ‘공정’이라는 단어로 불안을 합리화하며, 그 불안을 다시 사교육비로 지불하는 악순환을 만들어 왔습니다.


여기서 나세움 배움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이 1등을 뽑는 기술이라면, 사교육은 계속 커집니다. 반대로 공정이 ‘도달을 보장하는 약속’이라면, 사교육은 설 자리가 줄어듭니다. 학교가 기준을 분명히 하고, 그 기준에 닿을 때까지 보완과 재도전을 제공한다면, ‘한 번의 시험’에 모든 것이 걸리지 않습니다. 성취의 과정이 기록되고, 물음과 해냄이 평가의 중심이 되면, 시험 대비 기술은 힘을 잃습니다. 결국 사교육을 줄이는 길은 사교육을 잡는 게 아니라, 사교육이 자라나는 터전—줄세움 체제—을 바꾸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불안을 줄이자”는 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대신 “불안을 덜어주는 제도를 요구하자”라고. 아이가 밤 10시에 학원 계단을 오르는 사회를 ‘개인 선택’으로만 남겨두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도 같은 비용을 물릴 것입니다. 나세움 배움사회는 ‘학원 안 가도 된다’고 선언하는 나라가 아니라,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게 하는 나라입니다. 그 차이가 공정의 차이이고, 정책의 차이이며, 결국 삶의 차이입니다.


오늘의 뜻배음: 정보 하나 올리기 전에 “이 말이 불안을 키우나, 삶을 살리나”를 한 번 묻기.
다음 질문: 사교육을 ‘선택’으로 느끼게 하는 힘은 무엇이고, ‘필수’로 느끼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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