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억지배움’이니까

교육은 왜 억지배움이 되었나?

대한민국에서 ‘교육’은 대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너를 위해서”라며 동의도 묻지 않고 가르치는 일로 굳어졌다. 배움의 주인은 학생인데, 배움의 방향과 속도와 잣대는 늘 밖에서 정해진다. 그래서 교육은 자주 ‘강제로 부추기고 강요하는 억지배움’이 된다. 학교생활을 돌아보면 더 선명하다. 아이가 스스로 묻고 답하며 생각을 키웠던가. 교실은 종종 획일 지식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그 결과를 ‘주어진 물음’의 ‘답 고르기’로 재단한다. 국어는 해석의 여지를 지우고 정답을 외우게 하고, 수학은 풀이의 사유보다 속도를 재고, 영어는 삶의 소통이 아니라 빈칸과 패턴으로 길들인다. 배움이 깊어지기는커녕, “틀리면 끝”이라는 공포만 커진다.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진다는 자조가 괜히 나오지 않는다.


‘교육과정·교과서·고사·규율’은 억지배움의 장치가 되기 쉽다. 그 대표 사례로, 교육부가 2019학년도부터 초등 5~6학년 교과서(국어 제외)에 ‘기본 한자 300자’ 범위에서 한자 병기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던 일을 떠올린다. (한겨레) 취지는 ‘용어 이해 도움’이었지만, 후보 목록에 초등 수준을 넘어서는 한자가 섞였다는 비판과 사교육 우려가 곧바로 뒤따랐다. (EBS 뉴스) 논란 끝에 교육부는 이 정책을 폐기했다고 설명자료로 밝혔다. (교육부) 이처럼 “다 널 위해서”라는 말은 쉬우나, 배움 당사자의 동의와 필요를 건너뛰면 곧 강요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도 짙다. 학생을 사람으로 보기보다 ‘성과를 내는 상품’으로 바라보는 말이 교실에 스며든다. “당신은 사람인가 상품인가”, “품질을 유지하지 못하면 버려라” 같은 말이 교육의 상식이 되면, 학교는 배움의 두레(공동체)가 아니라 뽑기(선발)과 내몰기(퇴출)의 공장이 된다. ‘양계장 학교’라는 탄식이 여기서 나온다. 이런 억지배움은 학교 밖에서도 ‘교육 슈퍼마켓’으로 번진다. 부모 노릇을 하려면 ‘부모 교육’을 받아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도 전문가의 시범을 봐야만 가능하다는 듯 말한다. 돈을 내고 ‘교육’ 상품을 사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회, 일상에서 스스로 익힐 수 있는 힘을 잊어버린 사회가 된다.


정기고사와 수능 같은 일제고사 체제는 억지배움을 완성한다. 두 달에 한 번씩 같은 시험지로 줄을 세우면서, 어찌 답이 여러 갈래인 창의성을 말할 수 있나. 호기심이 살아 있는 과제를 두고 스스로 이모저모 깨치도록 돕는 대신, 학교는 시험 대비의 하청이 된다. 역량을 기른다고 말하면서 정답률로만 평가한다면, 그것은 거짓배움이다.

교육이란 억지배움의 이름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관행에서 이제는 내려와야 한다. 이를 벗어나는 길은 분명하다.

첫째, 배움은 ‘요청’과 ‘선택’에서 시작해야 한다. 학생이 도와 달라고 할 때, 학생이 고른 방식으로 배우도록 돕는 교사—그것이 참교사다.

둘째, 진단은 가볍게 하고 평가는 과정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수행과 죽모음(포트폴리오), 자기평가와 동료평가로 성장의 궤적을 남기자.

셋째, 규율로 길들이기보다 삶의 자리에서 배우게 해야 한다. 집에서, 일터에서, 대중매체에서—코로 냄새 맡고 손으로 만지며 스스로 묻는 배움이 되살아나야 한다. 배움은 ‘사람을 상품으로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힘을 기르는 배움누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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