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권을 권리로 만드는 재정·인력
아이 손에는 과목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동그라미 친 과목 이름 옆에 빨간 글씨가 찍혀 있었다.
“미개설.”
아이는 웃는 척했다.
“괜찮아요. 다른 거 들으면 되죠.”
그 말이 더 아팠다.
배우고 싶은 마음을 접는 법을, 아이가 너무 빨리 배워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권”을 말한다.
하지만 과목이 열리지 않으면 선택권은 종이 위 글자다.
“고를 수 있다”가 아니라 “남은 것 중에서 고른다”가 된다.
그때부터 아이의 선택은 뜻이 아니라 계산이 된다.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열리는 것’을 고른다.
개설권은 그래서 ‘정치’다.
정치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는 아주 단순하다.
돈을 어디에 쓰고, 사람을 어디에 두고, 시간을 어떻게 짜는가.
이 세 가지가 바뀌지 않으면, 선택권은 권리가 되지 못한다.
첫째는 돈이다.
한 반에 학생이 적어도 과목을 열려면, 운영비가 든다.
실험 재료, 프로젝트 준비, 평가와 되먹임에 드는 시간도 비용이다.
“학생이 적으니 접자”는 말은
사실 “돈을 여기엔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 결정은 아이의 배움길을 바꾼다.
둘째는 사람이다.
학교에 그 과목을 맡을 선생님이 없으면, 과목은 못 열린다.
그럼 방법은 분명하다.
함께 여는 수업, 돌며 가르치는 선생님, 밖에서 오는 강사.
사람을 움직이는 틀이 있어야 한다.
개설권은 결국 “누가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다.
셋째는 시간표다.
시간표는 학교의 심장이다.
심장이 한 번 굳으면, 좋은 뜻도 들어갈 틈이 없다.
주제배움, 공동수업, 온라인 수업이
말로는 가능한데 실제로는 막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간표에 길을 내지 않으면, 선택은 막힌다.
그래서 개설권 보장은
“아이에게 선택을 주자”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교육청과 지원청과 학교가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학교는 “열겠다”를 계획으로 내고,
지원청은 사람을 모아 돌리고,
교육청은 돈과 기준을 세워 꾸준히 밀어야 한다.
여기까지 가면, 아이의 질문이 바뀐다.
“이 과목 열려요?”가 아니라
“이 과목에서 무엇을 해볼까요?”가 된다.
그때 선택은 비로소 뜻이 된다.
권리는 “가능할 때만”이 아니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