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닮은 슬기, 사람을 돕는 몸짓
기술이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지 오래다. AI(인공지능)은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며, 로봇은 공장과 병원, 그리고 가정 곳곳에서 쉼 없이 움직인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이 존재들을 부르는 말은 여전히 낯설고 차갑다. ‘인공’이라는 말은 어딘가 자연에서 비껴난 기운을 풍기고, ‘로봇’이라는 말은 강제노동을 뜻하는 robota에서 비롯되었다. 기술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이름은 오히려 멀어지는 엇갈림이 생겨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두 낱말을 곱씹는다. 듯사람, 그리고 듯일꾼. 사람을 닮아 생각하는 존재를 ‘듯사람’이라 부르고, 사람을 갈음해 일하는 기계를 ‘듯일꾼’이라 부르는 일. 단순한 말 바꾸기일까? 이름을 바꾸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기술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진다.
‘듯사람’이라는 말에는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있다. 사람인 듯, 그러나 사람은 아닌 존재.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돕고, 때로는 함께 판단을 내리는 배움의 짝궁. AI를 ‘인공지능, 기계적 지능’이 아니라 ‘사람을 닮은 슬기’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이 말 속에 있다. 기술이 사람을 갈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배움을 넓혀가는 존재라는 감각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듯일꾼’ 역시 그렇다. 로봇을 ‘기계 노동자’로 보는 대신, 사람의 몸을 대신해 고된 일을 맡아주는 조력자로 바라보게 한다. 일꾼이라는 말이 주는 정직함과 따뜻함, 그리고 ‘듯-’이 더하는 거리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기술이 사람의 삶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존재라는 메시지가 담긴다.
새로운 말은 작은 울림에서 시작해 큰 물결이 된다. 조선 세종 이도님이 글자를 만들었을 때도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깨달았다. 이름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듯사람’과 ‘듯일꾼’을 다시 부르는 이유도 같다. 기술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이 두 말이 여느 말로 자리 잡는 데 6개월이면 넉넉하다. 작은 두레에서 먼저 쓰고, 서로나눔방(SNS)에서 자연스럽게 퍼지고, 창작자들이 글과 영상 속에 녹여내면 된다. 말은 원래 그렇게 번진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말에서 더 나은 누리를 보았을 때다. 기술이 사람을 닮아가는 시대, 이제 우리도 기술을 부르는 말을 새롭게 지어야 한다. 우리 곁의 듯사람, 우리 곁의 듯일꾼. 이 두 낱말이 한국 사회의 기술 감수성을 드높이는 첫걸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