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에 사니.”
이 질문은 오늘의 한국 청년에게 단순한 위치 확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개인에게 던지는 가장 잔인한 분류표이며, 출발선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강남, 강북, 지방의 작은 도시. 주소가 달라지는 순간, 기대되는 미래도 함께 달라진다.
이 질문이 힘을 갖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줄세움교육학습 사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성적, 스펙, 학벌, 부모의 재력까지 하나의 축 위에 세워 놓고, 그 위에서 누가 더 위에 서는지를 경쟁시키는 구조.
이 구조는 개인의 가능성을 확장하기보다, 이미 정해진 순위를 강화하는 데 더 익숙하다.
최근 조사에서 20~40대가 꼽은 ‘성공의 핵심 요인’ 1위가 부모의 재력이라는 사실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능력보다, 성실함보다, 태어난 곳이 더 중요해진 사회.
금수저·흙수저라는 말이 일상어가 된 이유도 결국 이 줄세움 구조가 청년들의 삶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구조가 청년들의 침묵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꽃보다 예쁠 나이라는데, 하루하루가 너무나 버겁다.”
이 말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적 이동성이 약화된 사회에서 청년들이 겪는 현실이다.
가난탈출비율이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하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다리는 존재하지만, 그 사다리에 오를 기회는 특정 지역과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사회에서 “너 어디에 사니”라는질문은 사실상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너는 이미 정해진 순위에서 어디쯤이니.”
이 질문은 청년의 가능성을 주소로 환산하고, 개인의 미래를 사회적 배치의 문제로 축소한다.
그래서 우리는 줄세움교육학습사회에서 ‘나세움배움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나세움배움사회는개인을 순위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대신,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가능성을 ‘세워주는’ 사회다.
배움은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삶을 확장하는 과정이며,
교육은 줄을 세우는 기술이지만 배움은 사람을 키우는 슬기사랑(철학)이어야 한다.
이 전환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교육 방식의 변화 때문이 아니다.
사회 구조 전체가 청년에게 던지는 질문을 바꾸기 위해서다.
“너 어디에 사니”라는 질문이 더 이상 미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지 않도록,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다시 힘을 갖도록.
강남에 살든, 강북에 살든, 진주 남강 근처의 동네에 살든.
출발선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차이가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사회라면 그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의 실패다. 나세움배움사회는 바로 이 실패를 되돌리기 위한 첫걸음이다.
청년들이 더 이상 ‘태어난 곳’으로 평가받지 않는 나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지금 줄세움교육학습사회를 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