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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전형’을 대학과 학생 당사자끼리로 돌려주자

김두루한(참배움연구소)

제3자가 대학 배움을 알 필요가 있는가


대학에서 배움을 누리고자 하면 누구나 제 뜻에 따라 배우고 싶어하는 것이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무적인 것도 아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대학에서 배울 기회를 얻는 것은 대학과 희망자 사이에 서로가 조건을 갖고 임해 일치하는 부분만큼을 계약하고 그 내용을 이행하는 것이다.  대학이 누구에게 이수기회를 제공하는가 하는 것도 제3자가 알 필요가 없고 어느 대학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가도 제3자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어떤 대학이 누구를 가르치고 싶어하는지도 공정하게 처리되어야 하고 누가 어느 대학에서 배우고 싶어하는지도 공개되어 공정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왜 그럴까.  공정의 실상을 좀 더 살펴보자. 그것은 대학교육이수희망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시험을 보아 성적을 공개하는 것은 한참 다음의 일이고 그 전에 이수희망의사부터 밝히도록 하여 공정성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즉 누군가가 어느 대학 어느학과에서 이수하고 싶어하는가를 다른사람들 예컨대 동료나 친지나 이웃이나 사회가 알게 한다.  


경매(競賣)와 그 논리구조가 같다. 경쟁의 장소에 머리를 내밀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의 개인의사가 노출되어야 한단 말인가. 대학측이 이수 희망자와 교육내용에 대해 의사가 합치되면 계약을 하고 서로 그 내용대로 이행을 하면 그만인 것을. 이는 기회를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 사이에 이익과 불이익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민주사회고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의사는 보호받아야 한다   


대학은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3자를 끌어들이고 공적인 행사로 격상시키며 제3자는 이를 빌미로 간섭에 나서고 사욕을 채운다. 학벌의식과 사교육시장과 정부와 대학의 허황한 권위주의가 이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교육을 분탕질치는 것이다. 어쨌든 입시는 이제 우리나라에서 대학과 희망자 사이의 문제 이상으로 우리 사회 모두의 관심사항이 되어 있고 국가마저도 깊숙히 개입하고 있다. 입시철에 온나라가 들뜨는 것은 그것이 공적인 행사이기 때문이다.  

   

 수십 만명을 승자와 패자로 가르고 서열체제를 해마다 새롭게 수립하는 대대적인 공식행사인 것이다. 입시철의 혼란을 그렇게 말고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처럼 무지막지한 일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한 개인의 의사가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막무가내로 공개되어야 한단 말인가. 언제나 개인의 의사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게 민주사회고 시민사회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과 같이 공개경쟁에서 대학교육이수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 직접적으로 학업을 이루지 못하는 불이익말고도 추가적으로 신분상으로 서열체제에 강제 편입되어야 하는 불이익을 어찌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 공산당 간부들의 당 서열이 공개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당 상층부의 권력을 서열을 매겨 분배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수십만명의 성적을 석차화해 공개하고 그에 맞추어 서열화된 대학에 배분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없는 인격침해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우리나라 입시제도는 공공연한 인격침해제도이고 학생들은 인권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꽃다운 청춘들이 스러져가는 건 대학교육이수기회를 얻지 못한 것보다 그의 좌절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공개하는 입시구조의 영향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는 도저히 그런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대학교육을 베풀고자 하는 대학측과 이수하고자 하는 희망자 사이의 관계는 사적인 계약관계이다. 사적 계약이란 계약의 주체(主體)가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해 계약조건을 임의롭게 제시하고 당사자 사이에 의사가 합치되면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사이에 두고 계약을 했다고 했을 때 누군가가 승리감에 도취될 이유도 없고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을 때 패배감에 젖을 이유도 없다. 대학이 제시하는 조건과 이수희망자의 조건이 합치되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가 더 아쉬움을 느낄 것인가. 만일 대학측이 아쉬움을 느끼면 대학측이 계약조건을 완화시키려 할 것이고 이수희망자가 아쉬움을 느끼면 그가 계약조건을 완화시키려할 것이다. 지금의 대학교육 이수희망자들이 이처럼 대학과 대등한 관계에서 계약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계약은 원래 대등한 당사자 사이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아까운 돈을 갖다주면서 질질 끌려다니고 지금같은 대접 밖에 못받다니. 대학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지금도 계약과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대학 어느학과를 지원할 것인가는 어쨌든 지원자측에서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그 바람에 소위 3류 대학들은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공급이 수요보다 적을 때는 공급자 우선 시장이 나타나고 수요보다 공급이 많을 때는 수요자 우선 시장이 나타나는데 대학시장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고 그 모두의 밑바탕에는 사적자치의 원리가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공개경쟁으로 신입생들을 선발한다는 것은 대학교육이수 희망의사를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공개하도록 요구한다는 데에서 사적자치의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는 신분경쟁이고 민주사회가 금기시해 마지않는 특권과 특혜를 인정하는 것이며 불평등사회와 사회의 분열(分裂)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대학입학제도를 대학측과 이수희망자 사이의 사적계약관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입학했다는 사실이 승리로 비쳐지지 않고(무심해지고) 입학 못했다는 사실이 패배로 간주되지도 않는(알려지지도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었으면 한다.     


 굳이 관심을 두고자한다면 대학이 얼마나 잘 가르치고 연구하는가 하는 것과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었으면 한다. 무얼 가르치고 배울지도 모르면서 환호하고 낙담하는 모습들이란. 대학들이 더 이상 특혜를 누리는 기관도 아니고 시혜를 베푸는 기관도 아니며 민주사회의 한 조직구성체로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면 그 뿐인 그런 대학이 되었으면 한다.

     

 또 수십만명의 대학교육이수희망자들을 성적과 석차와 합격과 불합격으로 문신을 새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입시제도라는 말을 입학제도로 바꿔놓고 그런 입학제도 본연의 모습을 찾아서 우리사회에 정착시키기만 하면 된다. (원래 서구의 대학입학제도에 공개경쟁시험선발제도라는 것은 없었던 것이고 지금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사회가 입시의 혼란이 사라진 평온한 사회가 되고 공정한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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