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에 산 지 일 년도 안 되었을 때 무척이나 우울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있을까...그런 고민을 했었다. 그건 언어 장벽도,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도, 추운 겨울과 짧은 해도 아닌,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정'의 나라에서 온 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오지랖일지 언정 관심을 갖는 것에 익숙했다. 약간 처진 눈매와 동그란 코, 차오른 볼살 덕에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를 지닌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꽤나 만만한 외형(?)을 지녔는데, 그래서인지 길을 가다가 갑자기 도움을 청하거나 말을 거는 사람들이 살면서 종종 있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이상한 사이비한테 잡혀서 삼십분 이상 설교를 듣지를 않나, 모르는 할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번호 교환을 하게 된 썰 등....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어쨌거나 사람들과의 교류는 내게 나쁜 경험보다 좋은 경험을 더 많이 줬다. 스몰 토크 문화가 없는 한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길 가는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에 더욱 서스럼없는 곳이란 건, 체코에 살면서 알게 됐다.
체코는 정말이지 개인주의가 그대로 반영된 나라다. 한 번은 얀과 길을 가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 길을 걷는데 한 할머님이 허리가 거의 90도로 꺾인 채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셨다. 안 그래도 신호등 길이가 짧은데 할머님의 보폭도 짧고 느려서 주위의 모든 차들이 일제히 할머님이 길을 건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마음이 급해져서 '할머님을 도와야 하나...' '혹시 모르니까 할머님 옆에서 같이 걸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얀에게 이 마음을 알리고 할머님 옆으로 가자고 하니, 얀은 단칼에 거절했다. 할머님이 오늘만 그렇게 걷는게 아니라면, 즉 할머님에게는 이것이 일상이라면, 할머님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가 옆에 가서 도움으로써 혹은 도와준답시고 옆에 같이 걸음으로써, 할머니는 스스로 '내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며. 내가 계속 옆에서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의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벙쪘다. 나는 선의라고 생각해서 행한 행동을 그렇게 받아 들일수도 있구나. 누군가를 위한 선의를 보이는 것보다 각자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체코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운 것은 아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이를 테면 키가 높은 트램에 유모차를 싣어야 하는 경우, 망설이지 않고 바로 도로로 뛰어나와 같이 유모차를 들어주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난 직후에도 자신의 방 한 켠을 내어주겠다고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무료 공간 대여를 신청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것을 보면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천천히 배운다.
가끔은 한국 식의 격렬한 교류가 그립기도 하다. 이번 한국 여행을 갔을 때, 친구와 안동을 여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타인들을 많이 지나쳤다. 우리가 길을 걸어오는 걸 보고 반대편에서 "젊은 사람들 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치가 빠른 친구는 "사진 찍어 드려요?"하며 물어봤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열 장 정도 찍어주고 왔다. 찍으면서도 웃으세요~ 아버님 더 웃으세요~ 너무 잘 나왔어요! 하며 얼마나 살갑게 그들을 대하던지. 그것은 친구만의 다정함이 빛을 발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타인들과 금방 엮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화 덕이기도 했다. 그럴 때보면 타인과 신속하게 연결감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정' 문화가 참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흩어진 듯 살아도 뭉치면 끈끈해지는 한국 사람들의 좋은 점일지도 모른다.
체코와 한국을 오가는 사람이 된 자는 한국에 가면 체코의 좋은 점들이 상기되기도 한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낯선 타인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을 몇몇 들었다.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좋은 말이든 안 좋은 말이든 평가하는 말들인데 체코에 있는 동안 말을 잘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이는게 습관이 되어 그런지 사람들이 작게 말하는 혼잣말도 내 귀는 다 담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는 나쁜 말은 별로 안 들었지만, 작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 가슴이 파인 원피스를 입고 여행을 갔더니, 어떤 남자가 내 모습을 보고 "어휴~ 시원~~~하겠네~"라며 비아냥댔다. 그 소리에 남자를 쳐다보니(거의 눈으로 욕을 했음) 그 사람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봤다. 이왕 쳐다본거 한 마디할껄. 예 시원~~~합니다. 지하철을 탔을 때는 미처 밀지 못한 나의 다리털을 보고 옆자리 사내가 대놓고 웃은 적도 있었다. ?! 너는 털 안 나니....
작년에는 마가 끼었는지 이런 경험을 우르르 하고 나서는 타인에 대해 쉽게 평가하는 한국 문화에 질려버린 마음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갈 때마다 귀가 더 쫑긋해지는지도 모른다. 또 나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까. 내가 나고 자라서 친숙하고 마음이 놓이는 나라에 이런 불필요한 긴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좀 더 서로에게 관대하고 각자가 그대로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기를 인정해주었으면 했다. 무슨 옷을 입든, 어떻게 생겼든,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살든 상관없이 말이다.
개인주의와 정 문화 사이의 그 어딘가에 살고 싶다. '다정한 개인주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개인을 살피고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찾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