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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l 21. 2024

03. Oh my darling, Clementine

외로움은 모든 존재를 부쩍 크게 만든다. 이를 테면 마음이 외로운 자는 지나가는 바람에도 꽃에도 어떤 존재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것은 외로운 마음이 한 일이겠지만 일정 부분 바람과 꽃이 한 일이기도 하다. 바람의 크기가 더 크게 느껴지고 꽃이 더 크게 보이고 문득 그것이 나를 지나갔다는 사실마저 크게 와닿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이 나를 통과해 저편에 가고 없다는 것을 인식한 자는 손안에 움켜쥔 존재가 없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이런 마음으로 살았던 몇 년 전, 나는 이제 막 타지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한평생을 한 동네에서 머무르다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지구 반대편 체코의 어느 집에 안착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시점에 문득 세상의 모든 것들을 비대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는 부재일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다고. 친구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평소에 먹던 음식이 없는 곳, 가로수에 놓인 꽃과 나무 마저 다른 곳에서, 퍼뜩 나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 길로 동네 대형마트에 향했다.


무엇이든, 어떤 살아있는 존재를 내 손안에 들여야겠다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외로워 살 수가 없겠다는 심정으로 마트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중 진초록색을 곳곳에 뿌리고 있는 한 화분을 보았다.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크기에 잎은 적당히 많아 건강해 보였다. 큰 고민 없이 그 화분을 손에 안아 들고 집에 가져왔다. 그런데 이 화분 무슨 꽃인가, 아니 꽃이 피기는 하나. 물은 얼만큼 줘야 하나. 집에 빛이 많이 안 드는데 혹시 햇빛을 많이 쬐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몰라도 너무 모르고 가져왔다. 급하게 화분 겉에 비닐로 쌓인 포장지를 읽어보는데 작게 ‘클레멘타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길로 이 화분은 이름 모를 초록색 식물에서 클레멘타인이 되었다.


클레멘타인은 창가에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았다. 물은 3일에 한 번 정도 준다. 조용한 녀석의 존재를 까먹고 일주일 만에 물을 줘도 튼튼히 잘 자란다. 하루는 적막한 집의 공기를 깨려고 사부작 사부작 청소를 하다가 클레멘타인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 보기도 한다. 어릴 적 유치원에서 했던 ‘고운 말, 나쁜 말 식물’ 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이 실험은 두 개의 양파를 준비해서 뿌리를 반쯤 물에 넣고 한 양파에는 고운 말을 해주고 다른 양파에는 나쁜 말을 해서 어느 쪽이 잘 자라는지를 보는 실험이다. 유치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지인 왈, 실제로 식물들은 랜덤으로 자라서 밤 사이 선생님들이 고운 말, 나쁜 말 이름표를 바꿔치기한다고 하는데… 어쩐지 나의 외로움은 클레멘타인에게 좋은 말을 해줘야 한다고 설득한다.


사실 클레멘타인은 제법 존재만으로 마음을 채우는 힘이 있다. 퇴근하고 돌아와 텅 빈 집을 보면 공허하다가도 창가에 새 잎이 난 클레멘타인을 보자 이내 뿌듯해지는 것이다. 못 본 사이 연두색의 여린 잎이 손톱만큼 피어 있었다. 여름에는 잎이 나는 속도가 무시무시하다. 바쁜 일상에 계절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내던 중 왕성히 자란 클레멘타인을 보면 아, 한여름이구나 하는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은근히 한 식구가 되어 날씨와 계절을 나누고 이윽고는 나와 건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잘 달래 왔다고 생각한 향수병이 곪아터진 어느 날은 몸과 마음 그리고 생활공간을 방치했다. 밥도 대충 해 먹고 청소도 안 하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화분은 존재마저 까먹어버린 몇 주. 그간 클레멘타인의 잎은 하나 둘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남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앙상해진 클레멘타인을 보자니 네가 무슨 죄니, 미안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지금이라도 물을 주면 다시 잎이 자랄 수 있을까.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마른 가지에 어서 물을 축인다. 일어난 김에 샤워도 하고 바닥에 나뒹구는 먼지도 닦는다. 그렇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클레멘타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여린 잎을 피웠다. 내 마음에도 회복의 싹이 텄다.


그렇게 클레멘타인과 함께 해오길 어느덧 5년. 그 사이 나는 두 번의 이사를 했다. 이직도 하고 애인도 만나 함께 살림을 꾸렸다. 최근에는 새로운 식구이자 재롱둥이 강아지인 ‘루피’를 데려왔다. 타지에서 뿌리를 천천히 내려 나갔다. 우연인지 몰라도 클레멘타인 역시 두 번의 분갈이를 했다. 클레멘타인의 분갈이를 할 때면 마음이 이상하다. 처음 데려올 적, 주먹만큼 뭉쳐있던 뿌리는 어느새 작은 바위만큼 커졌고 클레멘타인의 키도 이제는 작은 나무라 부를 만하다. 앙상하던 가지는 두께를 날마다 넓혀나가 곧게 뻗어있다. 초록은 더욱 진해져 멀리서도 그 선명함이 보인다. 소리 없이 자라는 초록의 향연을 보고 있자면 영원히 침묵해도 좋을 것만 같다. 그 순간만큼은 떠들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혼자 있어도 만물과 연결된 기분이 든다. 애쓰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어딘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마저 드는 것이 어쩌면 클레멘타인을 진정 가족으로 생각하나 보다.


올여름 클레멘타인은 언제나 그렇듯 푸르다. 이전처럼 클레멘타인에게 고운 말을 들려주지는 않지만 창가의 바람이 잎을 쓸며 지나가게 창문을 열어 둔다. 그럼 잎이 흔들리며 사라락 소리를 낸다. 마치 클레멘타인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들린다. 그 소리에 나는 클레멘타인을 지긋이 본다. 우리는 조용히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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