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체코어 사전

by 두루주

닥쳐라 (비드르쥬 호부)

꺼져 (이드 도 파르델레)

미친놈아 (씨 블라지네츠)

이런 씨발 (도 빠르델레)


이런 문구를 하나 하나 체코어 사전에 적는다. 체코어 사전은 말이 사전이지 내가 체코어 표현이나 단어를 수첩에 적어 들고 다니며 외울 수 있게 만든 것인데 최근 들어 험한 말들이 이 사전에 적혔다. 체코에 와서 갑자기 늦은 방황을 하고 있는 중인가 하면 차라리 그게 낫겠다 싶다. 금지된 것이 없는 어른의 세계에서 방황은 십대만큼 재미있지는 않고 그저 책임질 거리만 늘어나는 것이라 귀찮기만 하다. 그래서 이 사전에 적힌 말들의 출처는 어제와 몇 개월 전을 비롯한 기분 나빴던 날들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어제 파트너와 기분 좋게 이케아에서 가구 쇼핑을 마치고 돌아와 집 앞에 주차를 해놓고 들어가려던 참에, 바람도 선선히 불고 햇살도 따뜻해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청량했던 그 낮에, 아파트 창문 너머로 누가 소리쳤다.


중국인, 칭챙총, 니냐나(나름 니하오라고 한 말 같다)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니 아파트 3층의 창문 너머 많아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를 향해 눈을 찢고 있었다. 눈을 찢는 것은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을 향해 인종차별을 할 때 쓰는 행위로 상대적으로 쌍꺼풀이 없고 눈이 가로로 긴 동양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인데 그 아이는 정확히 나를 향해 그 행동을 취하며 웃고 있었다. 순간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사이 내 옆에 있던 파트너가 그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비드르쥬 호부, 그러니까 한국어로 입 닥쳐라 이런 뜻이다. 그 말을 듣고선 아이가 창문 밑으로 쑥 내려가 몸을 숨겼다. 순간 몸에서 열이 확 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표현이 이런 뜻이구나. 발끝에서부터 머리로 혈관을 타고서 피가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아이가 몸을 숨긴 창문에서는 한 중년의 여자가 나와 우리에게 무어라고 소리쳤다. 한 집에 사는 것으로 보아 그 아이의 엄마인 것 같았다. 더듬더듬 말을 헤아려보니 그의 말은 대강 이랬다. 아이가 장난 좀 쳤다고 바로 닥치라고 하면 되겠냐고, 우리 애가 뭘 잘못했냐고, 어떻게 어른이 아이에게 닥치라는 말을 할 수 있냐고. 그러니까 파트너가 아이에게 한 말, 닥치라는 말에 문제를 삼으며 아들의 잘못을 감싸고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앞마당에 서 있는 채로 3층 창문을 올려다보며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럼 눈 찢고 인종차별 발언하는데 가만히 있어요?" 우리가 쏘아붙이자,


아이의 엄마는 그게 중국인 인종차별이 아니라 "미냐오 미냐오" 고양이 울음소리를 따라 한다는 게 그렇게 들렸을 것이라며, 자기가 듣기에는 아들이 그저 고양이를 부른 것이라 말했다.


고양이 좋아하시네.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옆 창문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같은 집에 사는 그 아이의 아빠였다.


"이 나라에는 인종차별 같은 건 없는뎁쇼? 내 친구는 심지어 베트남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한 술 더 떠서 인종차별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언 역시 유치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었다. 체코에 베트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 그리고 확인할 길이 없는 그의 친구 관계를 들먹이며 본인을 비롯한 이 나라가 아시아 사람들에게 얼마나 친절한지를 두둔한 것이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지금 내가 알아야겠는 것은 이 아이의 행동을 진심으로 인종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이 아이를 가르칠 생각이 없는 건지였다. 그런데 아이가 쏙 숨어버린 창문 너머로 얼굴을 비추며 아들 감싸기에 나선 이 부부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묻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것 같았다.


"그러니까 아들이 잘했다는 거죠, 그쵸?"

이 말에는 그저 고양이를 불렀다는 둥, 인종차별이라는 개념은 처음 들어봤다는 둥, 말을 돌리거나 발뺌을 할 뿐 아들이 잘했다, 못했다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창문 밑으로 몸을 숨겼던 아이는 엄마를 등 뒤에 세우고 다시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창문에 눈만 내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찢고 어설픈 중국인 흉내를 낼 때와는 다르게 눈꼬리가 내려가 풀이 죽어 보였으나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눈치인지 모르는 눈치인지 그저 멀뚱해 보였다. 이 아이는 커서 어떻게 될까.


그와 동시에 이 동네에서 자랄 미래의 내 아이를 생각해 보았다. 이 집으로 이사 온 것도 파트너와 단둘이 사는 것이 아닌 나중에 아이가 하나 둘 생겼을 때를 생각해 좀 더 평수를 넓혀 온 것이었다. 자연히 이삿짐을 정리하고 가구를 갖춰 나가며, 아이는 몇 명이 있으면 좋을지, 언제쯤 갖는 게 좋을지를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돌연 창문 너머 나를 향해 중국인이라고 소리치는 열 살짜리 꼬마를 보고 나니 그 미래가 덜컥 겁이 났다. 내 아이는 절반은 동양인 절반은 서양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텐데, 체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생김새로 태어날 텐데, 멀리서 보아도 다르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텐데, 그걸 문제 삼아 집요하게 괴롭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쩌지. 그 먼 미래에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도록, 줄어들 수 있도록 하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생각을 할수록 머리에 뜨거운 피가 핑핑 돌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파트너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험한 말들을 받아 적었다. 체코어 수업에서 배우지 않았던 표현이었다. 체코어 수업에서는 어떻게 하면 공손하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거나 대화를 이어가는지, 생존과 공존에 필요한 단어와 표현을 익혔다. 하지만 교과서 밖 세상에서는 때론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무시를 받기도 한다. 내게는 이럴 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무기 같은 말이 필요했다. 닥쳐라, 꺼져라, 지금 뭐라고 했냐? 이런 말들을 받아 적었다. 그걸 받아 적으면서도 이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누가 나를 때렸을 때 내게 맞받아칠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용도로써는 충분했다. 언젠가 이 말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조용히 입 안에서 그 단어들을 굴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04. 다정한 개인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