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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주 Jun 30. 2021

행복론 점수 낮게 나온 썰

행복을 공부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괴한가. 만질 수도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행복을 대체 어떻게 가르치고 또 어떻게 배운담. 그런 의미에서 행복론 같은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 신기한 일을 내 동생이 하고 있었다. 동생은 대학교 졸업반으로 아직 대학교를 다니고 있다. 영문과를 졸업한 나와는 관련 없는 졸업 전시라는 것도 동생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디자인과이기 때문에 전시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이 꽤 힘들 댔다. 그래서 하루하루 앓는 소리를 하며 과제와 전시의 늪을 기어 다니는데, 그 와중에 행복을 공부한다고 했다.


동생이 행복을 공부하는 줄은 행복론 시험이 있는 날 알았다. 갑자기 카카오톡으로 온갖 철학적인 주제를 보내더니 글을 써달라는 동생. 이게 뭐냐고 묻는 나. 얼마 안 남은 마감시간. 그리고 재촉하는 동생.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시험을 보는데, 마감시간 안에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시험이라 답했다. 난데없이 받은 주제들은 30분 안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학생을 번호로 부르는 것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의 차이를 쓰시오> 같은 것이나 맹자였는지 공자였는지 노자였는지 모를 철학자의 이론과 함께 삶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셋 중 누구였는지 혹은 셋다 아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시험 도와주기를 애초에 포기해버리고 동생의 빠른 작문을 응원했던 것이다.

나의 빠른 포기로 동생은 더욱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작문을 했다. 나는 일말의 양심이 있어, 문제지라도 다시 읽어볼까 싶어 천천히 그것들을 들여다봤다. 그중,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당신의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간 사용설명서를 쓰시오. (14)


나는 당장 결혼 생각이 없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지만 어쩐지 그 글은 꼭 쓰고 싶었다. 배점이 가장 높은 문항인 것으로 봐서 이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인 듯했다. 나는 동생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인간 사용설명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엑. 한 줄 쓰고 보니 너무 별로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큰 행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행복과 직결된 이유인즉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동물로 태어났다면 더 순도 높은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더 행복한가, 이것이 내게 축복인가. 생각에 잠겼다.


급하게 타이핑한 것을 지웠다.


1.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십시오.


이것도 썼다가 황급히 지웠다. 화가 날 때, 화를 냈다가 오히려 불행해진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날 때, 화를 담다가 불행해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 때는 낼 수 있어야 했다. 무엇 하나를 골라 이렇게 해라 말하기가 너무 힘든 것인가. 설명서를 쓰기엔 삶은 다루기에 너무 복잡한 것이라서 차마 한 줄 한 줄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 이런 난해한 질문에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가혹하다.


1.

2.

3.

4.

5.

6.

7.

8.

9.

10.


숫자만 쓰고 삶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가만히 생각했다. 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삶은 열 가지의 규칙을 지킨다고 해서 완벽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며 열 가지의 규칙을 어긴다고 해서 완벽하게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맞는 규칙이 내일 내게 틀린 규칙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단언하고 사는 삶은 약속한 문장 외의 것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무 자르듯 잘려서 이곳부터는 허락이 되고 그 외에 것은 버려지는 삶은 반듯할 수 있지만 그것이 행복과 직결될지는 몰랐다.


난 이윽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상상을 했다. 내 품에 아이가 안겨있고, 나는 이 아이가 온 세상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행복하게 자라길 바란다. 이 아이에게 무엇을 들려줄 수 있을까. 그때 다름 아닌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야기는 한 소년이 허름한 차림의 노인을 만나며 시작된다.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길을 헤매던 중 한 궁전을 마주쳤다. 그 궁전에 문을 두드리자, 왕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맞이했다. 왕은 아이에게 궁전을 구경하겠느냐 물었다. 아이는 흔쾌히 궁전에 들어갔다. 왕은 구경하려는 아이에게 수저를 쥐어줬다. 그리고 수저에 기름을 따랐다. "궁전을 구경하는 동안 수저에서 기름이 떨어지면 안 되네." 아이는 수저를 쥐고 궁전을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구경을 마친 아이에게 왕이 물었다. "아름다웠나?" 그러자 아이는 말했다. "기름이 떨어질까 봐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왕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수저를 놓고 궁전을 구경하고 오게나. 아이는 그제야 궁전에 어떤 그림이 걸려있고 계단은 어떻게 생겼는지 유심히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궁전이 너무 아름답다고 말했다. 왕은 아이에게 속삭였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수저를 쥐고서도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이란다."


이 이야기는 연금술사에 나오는 한 장면이었다. 그것을 읽고 잠시 잊었는데, 동생이 행복을 공부하는 덕분에 내게 다시 다가왔다.


나는 글자 수에 맞게 이야기를 수정해서 동생에게 보냈다. 


"야야 이게 인간 사용설명서임"


동생은 그것을 읽더니 물음표를 다섯 개쯤 보냈다. 대충 이게 뭐냐, 이렇게 내면 망한다, 인간 사용설명서를 쓰랬는데 왜 소설을 썼냐, 이제 5분 남았는데...? 대체 뭘 한 거냐의 함축적인 의미인 듯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론 시험지의 답안으로 제출되었고 동생은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성적 개 낮게 받음 ㅋㅋㅋㅋㅋ


이렇게 내 점수는 아니지만 행복론 점수는 (개) 낮게 나왔다. 어떻게 써야 정답인지, 어떻게 써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행복에서 멀어진 것 같은 기분만이 남았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사용설명서를 쫓으며 살아야 하는지 역시도 미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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