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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루Lee Nov 08. 2023

소맥 받고 백화수복

술 한잔 데워 먹기가 이렇게 힘들다

넘쳐 나는 소맥의 물결 속에 탈락의 쓰라림을 위로받으며 마음을 다잡 동안 눈여겨봐 둔 동기님의 합격소식이 들려왔다. 소맥 털고 백화수복을 띄웠다. 그날로부터 하루빨리 백화수복 데워 마시기 위해 안달을 내기 시작했다.


데워마신 술을 운운하고 있자니 삼국지에 한 장면이 떠 올랐다. 조조가 건넨 데운 술 한잔. 그 술잔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와 마시겠노라 장담한 관우. 맞나? 아무튼 신속성공. 그 신속하고 깔끔한 승리가 떠올랐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 신속합격!!




빨리 합격해서 나도 구독자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하하호호 브런치 예찬에 나도 끼고 싶다. 격하게 끼고 싶단 생각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오직 신속합격을 향해 달려가게 했다.


은경쌤의 위로와 함께 피드백이 주어졌다. 머리를 싸매고 글을 뜯어고쳤다. 피드백을 다시 보며 쓸 거리를 찾아냈다. 늘어날 거 같지 않던 글의 길이가 늘어난다. 세수도 못 하고 저녁 준비를 해야 할 늦은 오후가 돼서야 드디어 마쳤다. 하얗게 불태운 하루를 만족하며 파일을 올린다. 또다시 피드백이 주어진다. 이번엔 간단하다. 길어져서 지웠던 글을 다시 붙여서 완료해 올렸다. 피드백을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공유드라이브를 들락날락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피드백해 뒀다며 확인해 보고 제출하라는 톡이 왔다. 기대하며 공유드라이브로 가 내 이름의 폴더를 찾아 피드백 파일을 확인한다.  '제가 드린 글 참고하셔서 (마음껏 사용하셔도 되어요) 다시 지원해 주세요~' 


별다른 언급은 없네..  주신글은 어딨다는거지? 생각하며 제일 위에 있는 파일을 클릭했다. 당시 눈이 돌아갔는지 참고하셔서는 보이지도 않고 굵은 글씨만 눈에 들어왔다. 다잡았던 마음에 태풍이 몰려오기 시작한 건 파일이름도 제대로 확인 않고  열어 본 그때부터였다. 당혹스러움과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오만 가지 감정들이 나를 휘몰아쳤다. 이게 뭐야!! 이게 뭐지!! 이게 뭐냐고!!!! 이건 내 글이 아니잖아!!!!!!!!!!!!!!


여기서 잠깐!! '남에 글에 손을 대다니 나빴네!'로 동조하거나, '고쳐주면 감사한 줄이나 알지 뭐래' 등의 판단은 금지. 이성을 찾고 보니 참고하란 소리의 참 뜻을 알게 된다.

참고해서  더 퇴고해 보세요.

그땐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재도전을 위해 고치고 고친 글이 위트도 부족하고, 벼룩시장의 생동감도 안 살아 고민이었으나 더 나아지지 못한 상태였다. 은경쌤이 수정한 글은 곳곳에서 밝은 기운이 묻어났다. 위트가 살아 있었다. 나는 안 됐던걸 해 낸걸 보니 탐이 난 것도 사실이다. 이걸 풀어 설명하느니 직접 시범 보이기로 하신 거겠지. 하지만 이 글은 내 글인 듯 내 글 아닌 내 글 같은 글, 님 글인 듯 님  아닌 님 글 같은 글!



일단 글을 내 말로 다시 수정해 봤다. 은경쌤을 지울 수가 없다. 좌절다. 최소 70프로는 지워내야 할거 같은데 30프로도 못 지워낸 거 같다. 과연 13프로는 지워 냈을까. 에라 모르겠다. 빨리 합격하고 싶으니 일단 올렸다. 요일 늦은 밤, 내게 절망감을 안겨준 그 글과 결탁해 신청서를 쓰고 잠이 들었다. 합격에 눈이 먼 채로.






아침이 밝았다. 한가해진 오전 10시경.

브런치팀에서 내 신청서를 봤을까 궁금해졌다. 그 글로 나 붙으면 어떡하지? 떨어져라 차라리 떨어져라. 이제야 조금씩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떨어지길 바라다니! 그 충격을 또 어쩌려고! 그러나 이대로 덜컥 합격해 버리면 나는 왠지 브런치가 소중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글을 올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붙어버리면 어쩌지 불안감이 몰려오자 나는 얼른 작가 신청을 취소했다. 이제 뭘로 작가 신청할지 고민이 됐지만 놔 버린 이성의 끈은 붙잡은 거 같았다. 




쌤의 손길 받기 전의 글을 째려봐도. 받은 후의 글을 째려봐도 갈길이 안 보였다. 새 글감을 찾아봐도 마땅한 게 없었다. 이제 신속합격에 대한 집착은 조금 내려놓았지만 갈길이 안 보이는 막막함과 싸워야 했다.



나의 이런 복잡한 심정을 심플하게 카톡으로 올릴 수가 없었다.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거 같았다. 장황하게 올리자니 개 찌질 대왕 진상이 될 것 같다. 쓰고 지우고 하길 수차례. '선생님 주신 피드백글에서 벗어나질 못 하겠어요. 새로 써야 하는 거 아닌지 고민이에요.' 질문을 올렸다. 나의 질문은 벗어나지 못하는 거에 무게가 있었는데, 은경쌤은 새로 써야 하는지 고민이라는 질문에 무게가 간 것 같았다. 은경쌤은 '벗어나지 마세요'로 답하셨다. 이 추측도 이성을 찾고 보니 든 생각이지 그땐 사그라들던 원망의 불길을 다시 일으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그래!!!  나 철저히 은경쌤을 지워 주겠어!  벗어나지 말랬지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정신을 집중시켰다. 1차 도전 전부터 은경쌤이 추천해 주셔서 취했던 '드디어 오늘, 벼룩시장이다. 내 이날을 위해 몇 바퀴의 미싱을 돌렸던가.' 문장부터 버렸다. 글의 첫 문장이었다.



첫 문장부터 은경쌤을 지우고 그 문장을 빛 내게 하고 싶어 꾸며 놓았던 두 번째 문장도 걷어 내버렸다. 이제 내 글을 살려내기 위해 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꾸며지지 않던 벼룩시장의 활기참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시작이 좋다. 거창하게 스승님을 찬양하던 부분도 소개하는 정도로 정리했다. 써놓고 아까워 못 버렸던 문단은 은경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날렸다. 문단 배치를 내 입맛에 맞게 다시 수정했다. 마지막을 어떻게 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완성이다. 벗어났다. 드디어 그녀의 그늘을 벗어났다.  금요일 저녁이었다.


주말 내내 쫄리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에는 브런치 작가신청을 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1차 지원 때 느껴 봤으니까. 하지만 2차 도전 후 주말은 평온했다. 퇴고의 맛을 제대로 봤기 때문일까!! 주말을 잘 보내고 대타 알바를 가볍게 마친 월요일 퇴근길. 나는 백화수복을 안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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