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려갈 사람이 있을까? 아니면 저 늙은 개들처럼 여기서 잊힐까?”
보리의 첫 번째 생은 가난한 가장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전국을 돌며 트럭을 몰고, 아파트 외벽에 시멘트를 바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고단했지만 가족의 밥상은 책임질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술잔에 밥을 말아 삼켰다.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봄비가 그친 고속도로 위는 눈부시게 맑고 따스한 기운이 나른하게 만들었다. 며느리가 조리원에서 나왔을 때는 아껴 둔 50만 원을 부쳤다. 오늘이 드디어 손주를 직접 품에 안아 보는 날, 며느리는 백일이라 집에서 밥을 먹자고 했다. 아기에게 술냄새를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아 지난밤 술도 들이키지 않고도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 일찍 목욕탕에 다녀온 길이었다.
봄기운이 도로 주변으로 빠르게 번져가며 작은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날렸다. 터널 입구에 다가왔을 때 앞에 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줄지어 있었다. 그는 앞 상황을 살피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려 하는데 뒤에서 달려온 덤프트럭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타이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쾅하고 자신의 챠를 들이받았다. 차는 앞으로 밀려가더니 이내 트럭 밑에 깔려버린다. 줄지어 선 차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여기저기서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천지를 울려댔다.
순간 떠오른 건 영상 속 방실거리던 손주, 그리고 먼저 떠난 아들이었다.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자금 대출을 갚았고, 졸업 후 공기업에 입사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혁아 혁아, 아들을 부르고 싶지만 차마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거꾸로 도는 시계에 갇힌 것처럼 생각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듯하다. 어쩌면 이제는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렇게 걸어, 배에 힘 딱주고, 발 보폭은 어깨보다 더 넓게, 나처럼 말이야. "
보리는 몸통의 길이에 비해 현저히 짧은 두 다리지만 발은 꽤 넓적하고 컸다. 시우에게 보라는 듯이 발의 보폭을 넓게 벌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른 봄이라 아직은 길 위에 냉기가 전해졌다. 보리와 시우는 평소처럼 아직 남아있는 해를 머리에 이고 근처 둘만의 아지트 같은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마을이 재개발되면서 전망대가 만들어졌다. 전망대가 가까워지자 보리는 헥헥거렸다. 둘의 등 뒤로 해는 그들의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 엄마가 오시기 전에는 돌아가야 해, 너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걸 엄마가 아시면 혼내실 게 틀림없어 .“
평소 지영은 보리와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 산책을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보리도 아파트 밖을 벗어나고 싶은지 종종 시우를 끌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언덕에 도착했을 무렵 낯익은 몸체들을 보고 시우는 마치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고 보리를 잡은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누굴까? 시우와 키가 비슷한 아이들을 보고 차갑게 얼어붙은 모습, 멀리서 딱지를 치는 아이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빙글거리는 목소리와 이죽거리는 말투에 시우의 얼굴은 굳어졌고 다리는 떨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