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셋이 다가왔을 때, 보리의 끈을 단단히 잡은 시우의 손은 긴장한 탓에 땀이 베여 나왔다.
"야, 시우야! 너 강아지 있어? 근데 너처럼 조그마하네. 설마 무는 건 아니지?"
“ 야! 얘 아빠 없잖아. 그래서 강아지랑 다니는 거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시우의 가슴속에서 오래된, 설명하기 어려운 고립감 같은 것이 꿈틀거렸다. 이때 시우 앞으로 천천히 보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보리는 낮고 탁한 음성으로 으르렁 거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일제히 길 옆 풀숲으로 도망쳤다. 시우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털썩 다리에 중심을 잃고 벤치에 앉자 보리는 시우의 무릎 위에 머리를 얹었다. 시우는 털을 쓰다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손짓을, 나는… 어디서 해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눈을 감고 그때의 감각을 짚어가자 아빠가 하늘로 가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만졌던 그때 전해지던 온기가 점차 떠오르는 것 같았다.
지영도 시우에게 '아빠'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남편 정현이 몰던 차에 함께 있던 시우와 사고를 당한 후부터는 말이다. 그땐 시우가 어렸기에 기억 속에 아빠는 늘 작은 점처럼 보일 듯 말듯했다. 시우는 조용히 아빠라는 단어를 속으로 떠올렸다. 그러자 보리의 꼬리가 천천히 흔들렸다.
보리는 엎드린 몸을 일으키곤 부르르 먼지를 털어내고 시우와 눈을 맞춘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시우가 보리와 툭툭 발을 맞추자 보리는 시우를 어디론가 이끈다. 공원호수는 넘어가는 햇빛을 받아 일렁거리머 부서지는 빛을 토해내는 듯했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호수 가장자리로 흐르는 물결을 따라 오리가족이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짓은 마치 깊은 세계로 길을 여는 문처럼 보였다. 익숙한 듯, 처음인 길을 걸으며 지영이 걱정하리란 생각은 사라진채. 보리는 오리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지 지난 생을 거쳐온 기억 속의 얼굴들이 그립기만 했다.
지영은 시우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공부방에 가 있어야 할 시간 시우가 결석했다는 전화에 지영은 퇴근을 서둘렀다. 분명 시우와 집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둑해진 동네 공원, 마트, 골목등을 찾아 나섰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우의 충동성과, 약함을 알기에 불안이 몰려왔다. 자신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개를 데려와서 일이 커진 것 같아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둘의 모습이 퍼뜩 보이지 않아 발을 동동거릴 무렵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아주머니, 우리가 순찰을 돌다 어린아이가 개와 걷고 있는 모습이 걱정이 돼서 저희가 차에 태워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개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줄을 개에게 끌려가고 있던데요, 거참 둘이 걷는 모양새가 희한해요."
지영은 파출소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시우가 친구를 만났던 일에 대해 들었다.
“시우야… 너,
왜 그 아이들이 한 말을 듣고도 울지 않았어?”
" 엄마, 보리랑 공원호수에서 오리가족을 구경했어. 오리가 차가운 물속에 머리를 풍덩풍덩 담그더라. 한참을 그걸 구경하고 오다 보니 집으로 오는 길이 헷갈렸어."
시우는 대답대신 반달눈을 뜨더니 지영에게 나른하게 머리를 기댄다. 이내 얕은 잠에 빠져들듯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