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과 혁(8화)

by 김작가

지영은 대학 같은 과에서 혁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혁은 늘 어느 정도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유행이 지난 옷차림에 낡은 백팩을 무겁게 메고 다니며 수업시간에 다소 호전적으로 교수님들에게 질문도 놓치지 않는 학생이었다. 혁과 나란히 나란히 하게 된 날은 학과 회식 자리였다. 그날 혁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돼 왔다고 했다. 자신은 장학금을 놓칠세라 일과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잔뜩 취기가 올라있었는데 지영은 참 열심히 사시네요, 하며 잔을 부딪쳤다. 지영은 매월 한 번 독서동아리에서 고전문학을 읽고 서평을 쓰는 시간을 좋아한다고 했다가 수업이 끝나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하루치의 잠을 줄여가며 긴 하루를 보내는 혁에게 미안한 감정마저 들게되었다. 술에 취한 혁은 자신도 원래는 책을 좋아했다며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내 독서반원이었다며 상기된 얼굴로 반색했다. 지영이 요사이 읽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책 이야기를 꺼내자 혁은 자신도 고등학교 때 읽다가 만 책이라고 했다.

“지영 씨, 안나가 사랑에 빠져서는 가정을 버리고 그게 행복일지 파멸일지 알면서도 가잖아요. 사람이 그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끌릴 수 있다는 게… 전 조금 무서웠어요.”

혁이 단순히 줄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자신의 삶을 비춰 이야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 지영이 말했다.

“안나는 뜨거운 사랑을 하다 불에 덴 사람 같아요, 아름답고 안타까운 여자죠.”

“ 지영 씨는 그런 사랑 어떻게 생각해요?”

“ 음, 아직 그렇게 모든 걸 버릴 만한 남자를 못 만나서요.”

둘은 그날 이후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화르륵 타는 줄도 모르고.


혁이 취직을 하고 비싼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지영에게 청혼을 했다.

"지영아, 나는 이제 터널을 지나온 것 같아, 그렇지?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던...

지영은 혁의 손을 꼭 쥐었다. 고생했다는 말 대신 직장생활은 어떤지 지영은 종알종알 참새처럼 질문해댔다. 지영은 그때 혁에게 앞으론 내가 너랑 함께 걸을께. 라고 말하지 못했던 걸 후회했다.

얼마 후 회사 회식 후 지영에게 ‘곧 도착해’라는 문자만 남기고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택시가 중앙선을 넘은 다른 차량과 충돌했다. 지영은 혁이 짧고 벅찼던 삶을 견디다 마침내 한순간 따뜻한 웃음을 남기고 어딘가 더 밝은 곳으로 떠났다고 생각됐다. 지영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혁의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공기 속에서 잠시 머물다 아주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지영은 임신 사실을 알고 아직 말하지 못한 채였다. 혁이 모르는 혁의 아이. 둘의 사랑이 남긴 단 하나의 결실. 혼자가 아니라 여전히 둘이라는 알 수 없는 느낌을 간직했다.

옆자리에 잠든 시우를 보며 지영은 잔잔히 혁을 생각하며 시우를 잘 키우겠다던 다짐을 상기했다.


"시우야. 보리도 다리를 아껴야 돼, 개들은 슬개골이 약해, 아직 보리가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너무 무리하게 돌아다니는 건 안돼, 개들은 사람들의 나이에 7을 곱한 삶을 살아가. 무슨말이냐면, 만약에 보리가 일곱 살이 되면 인간 나이 쉰 살정도 되는 거야. 알겠어?"

금세 시우눈에 눈물이 또르르 글썽였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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