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 위 커피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 앙다문 입술이 지영의 심경을 표현하는 듯했다. 마주 앉은 황실장이 지영앞으로 밀어놓은 종이엔 계약파기에 대한 배상금액이 쓰여있었고 연신 지영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곧 초등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지 않겠냐고 지영의 어머니가 여러 차례 물어왔던 터다. 별거 아닌 돈이 이사비용에 보태 쓰기 좋은 금액으로 보였다. 지영은 이런 생각이 불쑥 올라오는 자신이 치사하다 생각됐다. 어차피 1년 계약이었다. 끝까지 데리고 있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아들 시우를 위한 단기계획의 일부정도였다. 학교 앞의 아파트의 월세가 비쌌다. 지영은 당연히 적은 평수로 가려고 생각했기에 동물까지 함께라면 지금보다 불편해질 수도 있었다.
이사비용, 계약금, 월세, 시우의 학교…
현실은 늘 계산기를 두드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퇴근 후 시우와 보리가 꼬리를 흔들며 현관으로 달려오던 장면, 시우가 숙제를 하다 말고 “보리야, 여기 앉아” 하던 목소리, 새벽에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다 거실 불빛 아래서 마주쳤던 작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냥 보리랑 계속 살면 안 되는 거야?"
"안돼, 보리를 센터에서 빌린 거잖아, 이제 데려가야 한데." 편치 않은 지영도 우는 시우를 달래야만 했다.
시우는 자주 보리 이야기를 꺼냈다. 지영은 애써 화제를 돌렸지만, 대화는 번번이 그 자리로 되돌아왔다. 유튜브를 열기만 해도 알고리즘은 동물 영상들을 끝없이 불러왔다. ㅎ펫렌털 업체의 홍보 영상도 다시 떠올랐다. 동물보호 단체에서 사업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음에도, 최근 후기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몇 달 전보다 더 많아진 사진과 일상 기록들.
사진 속 강아지들 중에, 보리와 닮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들여다본 적도 있었다. 같은 종은 유난히 닮아 있었다. 이름이 없으면 구별할 길이 없었다. 그 무렵 뉴스에서는 동물을 임시보호하겠다며 데려간 한 남자의 잔인함이 보도되었다. 전문가들은 그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인다고 했다. 임보 비용을 받고 개와 고양이를 데려간 뒤, 분노를 풀기 위한 도구처럼 학대했다는 내용이었다. 서른 마리가 넘는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는 동물들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다고 했다. 임시보호를 맡겼던 보호자들이 화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보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 보리를 데려간 부부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겠지. '
그날 오후, 펫렌털 회사에서 설문 링크가 도착했다. 이용 후기를 남기면 재이용이나 소개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 소개 시 백화점 상품권 5만 원 지급. 지영은 자신에게 업체를 소개했던 수연을 떠올렸다. 꼭 상품권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연은 누구보다 지영을 걱정했으니까. 하지만 백화점에서 평소보다 비싼 물건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 수연의 모습을 상상하자,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스며들었다. 지영은 ‘펫렌털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남겨 달라’는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보리가 집에 와서, 자신 대신 시우의 마음을 채워 주었던 시간들을 써야 할까.
아니면 이 사업이 결국 누구도 만족 시키지 못하는 구조라며 사라져야 한다고 적어야 할까. 그럼 이런 사업을 이용한 자신은 뭐가될까 생각하고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링크를 닫아버렸다. 삶은 종종 침묵을 택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지영이 퇴근 후 어둑한 공동현관에 들어서자 고장난 건지 센서등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이때 발밑에서 물컹한 무언가가 밟혀 하마터면 넘어질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