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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희 Dusky Feb 12. 2021

일본 문화 속 재즈 클럽

롯폰기 - 시부야 - 다이칸야마 - 산겐자야

2018. 2. 11.


이번 도쿄 여행을 결심하게 된 나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던 기타리스트 Denis Chang의 집시 재즈 워크숍이 끝났다. 기대보다 훨씬 많은 뮤지션들이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면서 SNS에서만 서로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몇몇의 뮤지션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곳에서 처음 만난 낯선 타국의 연주자들과 함께 나는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또 밤이 새도록 잼 세션도 즐겼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나는 대부분 모국어 밖에는 할 줄 몰라서 의사소통도 어려웠던 도쿄의 로컬 뮤지션들과 짧은 일본어, 영어, 그리고 무엇보다 효과적인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우정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아마 세상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어떤 말보다 효과적인 교감인 음악, 특히 잼 세션 덕분에 서로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지 않았었나 생각한다.

어딜 가든 크고 무거운 악기를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뮤지션들의 삶.

그리고 워크숍이 끝난 오늘 아침, 즐거웠던 어제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다시 갈 곳 없는 배낭 여행자의 현실로 돌아왔다. 도쿄를 방문하기 전 예약해두었던 유일한 숙소였던 카구라자카의 게스트 하우스도 벌써 체크 아웃해야 하는 날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정말 어디로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장 오늘 잘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15일까지 남은 5일간 나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뭐, 이제부터는 그냥 느릿느릿 도쿄 여행을 즐기면 될 일이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또 걷고, 힘들면 커피를 마시고, 심심하면 잼 세션을 하러 가까운 재즈 클럽에 가면 되지' 


라는 심산으로 나는 골목골목 고즈넉한 술집들이 많이 있다는 산겐자야(三軒茶屋) 인근에서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정하고 최근 구입한 카메라 때문에 더 관심이 많아진 롯폰기의 FUJIFILM SQUARE로 향했다. 




FUJIFILM SQUARE 


롯폰기는 도쿄 미드타운과 롯폰기 힐스로 대표되는 도쿄의 대표적인 미래 지향적 복합 문화지역으로 꼽힌다. 롯폰기 역에 도착해서 FUJIFILM SQUARE까지의 길은 시원시원한 길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세련되고 도시적이면서도 큼직 큼직한 도시 디자인에 나는 '지금 내가 도쿄 최신의 지역에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넓은 지하 대로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니 넓은 광장 한켠에서 FUJIFILM SQUARE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FUJIFILM의 필름 제품군을 진열해 놓았다.

FUJIFILM SQUARE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주로 FUJIFILM 제품군을 중심으로 과거의 카메라 제품들과 사진, 영사 장치들을 전시해놓은 박물관 구역, 그리고 주로 사진 전시를 하는 1층의 갤러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2층에 위치해 있었던 박물관 구역에서는 오래된 사진들을 비롯해 과거에서 현재까지 시대순으로 필름, 카메라 등 다양한 FUJIFILM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과거의 영사 기술을 내 손으로 직접 움직이며 체험해볼 수 있는 곳도 있어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박물관 관람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오래된 영사 장치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또 1층의 갤러리에서는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방문했던 당시에는 FUJIFILM에서 개최한 사진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들과 유명 사진작가들의 독특한 사진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폐품을 활용해 그림 같은 느낌을 낸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 

FUJIFILM SQUARE의 갤러리와 박물관 관람은 무료여서 사진전에 관심이 있거나 카메라, 특히 필름 카메라에 관심이 있다면 꼭 방문해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갤러리 한켠에는 도쿄 내 다양한 사진전 정보를 엽서와 함께 진열해둔 곳 도 있어서 이곳을 먼저 방문해서 가볼만한 전시들을 주요 동선으로 여행 계획을 짜보는 것도 괜찮은 여행 방법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도 진열된 사진전 정보들을 보고 다른 전시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롯폰기의 랜드마크 롯폰기 힐스를 지나 시부야로 향했다. 

롯폰기 힐스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Billiken Shokai (ビリケン商會)


어차피 시부야를 지나갈 계획이었던 나는 FUJIFILM SQUARE에서 흥미로운 전시를 하나 발견하고는 직접 가보기로 했다. 발견한 전시는 어떤 작가의 고양이 사진전이었는데 고양이도 좋아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갤러리도 궁금했던 나는 시부야의 작은 갤러리 Billiken Shokai (ビリケン商會)로 향했다.

전시된 여러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

직접 방문한 Billiken Shokai (ビリケン商會)는 갤러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담하고 예쁜 상점 같은 곳이었다. 길게 늘어진 상점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홀 벽 군데군데 필름으로 촬영된 아늑한 느낌의 고양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 쪽으로는 수집품 같은 올드 토이와 동화책, 잡지와 CD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한켠에 진열되어 있던 인상 깊었던 일러스트 작가의 아트북도 사진으로 한 장 남겨두었다. 

SHIMODA라는 일러스트 작가의 아트북.




그리고 시부야를 지나 전통 예맨 커피를 취급하는 Mocha Coffee (モカコーヒー)가 있는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다이칸야마로 향하는 길에 있던 수많은 그라피티들.




Mocha Coffee (モカコーヒー)


다이칸야마의 모카커피는 수많은 예쁜 상점들 사이에 조그맣게 숨어 있는 정원이 둘러싼 작은 카페이다. 원래 모카커피는 예맨의 항구 도시인 '모카'에서 생산된 커피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작은 정원이 둘러싼,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카페 <Mocha Coffee>.

모카커피는 향이 부드럽고 카페인이 적어 잠자기 전에 마셔도 괜찮다고 한다. 내가 마셨던 예맨 원두 이스마이리(ISMAILI)는 초콜릿 향이 은은하게 퍼지며 여행의 피로를 기분 좋게 풀어주었다. 




그리고 다이칸야마를 지나 나카메구로를 향해 또 걸었다. 




원래 만개한 벚꽃으로 유명한 나카메구로에는 아직까지는 꽃을 피우지 않은 벚꽃들이 길을 따라 늘어져 있었다. 나카메구로 역을 지나 철길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일본의 소도시를 연상시키는 고즈넉한 동네가 보이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작은 놀이터 옆으로 카페 오니버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예쁜 꽃을 피울 메구로 강의 벚꽃들.


오니버스 카페 (Onibus Coffee)

 

도쿄의 많은 카페 중에서도 맛으로 꽤 정평이 나있는 오니버스 카페(Onibus Coffee)는 혼잡한 도시 느낌이 덜한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 휴양지에 와 있는 것 같은 평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카페 2층에서 나카메구로 역에서 이어지는 철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특한 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오니버스 카페. 혼잡한 도심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의 잼 세션을 위해 도리스다이가쿠(都立大学)역에 위치한 재즈 클럽 JAMMIN' (ジャミン)을 향해 이동했다.




JAMMIN' (ジャミン)


한국말로 도립대학이라는 뜻을 가진 도리스다이가쿠역(都立大学駅) 주변은 마치 말 그대로 한국의 오래된 대학가 주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마 관광 목적으로는 거의 올 일이 없어 보이는 이 오래된 동네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역에서부터 멀지 않은 역시 오래된 건물 2층에 마치 사무실 문 같아 보여서 나를 잠깐 주저하게 만들었던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1930년부터 지금까지 90년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재즈 클럽 JAMMIN' (ジャミン)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즈 클럽 JAMMIN' (ジャミン)의 BAR의 모습.

재즈 클럽 JAMMIN' (ジャミン)에 들어선 순간 나는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흘러 은은한 빛깔을 띄는 가게 전체를 둘러싼 목제 인테리어가 자아내는 중후한 분위기와 일본에서 방문했던 다른 재즈 클럽에 비해 상당히 넓은 공간에 놀랐고, 손님의 대부분이 중장년 층인 이 오래된 재즈 클럽에 자신을 대학생으로 소개한 젊은 직원이 일하고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고, 수십 명의 잼 세션 참가자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또 놀랐다. 

BAR에 앉아서 바라본 잼 세션 무대의 모습.

이날 재즈 클럽 JAMMIN'에 방문했던 이유는 오후 2시부터 열리는 잼 세션이 있다고 해서였는데 아무래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참여하기 어려운 낮 시간에 열리는 잼 세션이다 보니 다소 연세가 있어 보이는 중장년 층의 아마추어 연주자가 참가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잼 세션의 분위기는 격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다소 차분하게 진행되었고 한국에서 찾아온 젊은 프로 연주자인 필자는 당연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음향기기들 앞에서 잼 세션을 즐기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사실 한국의 프로 연주자들의 실력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스스로 딱히 엄청 대단한 실력의 연주자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에서 음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프로 음악가의 입장에서 어쩌면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 같은 곳에서 잼 세션에 참여하게 된다면 필자 역시 크게 혼줄이 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어떤 국가의 잼 세션을 가보더라도 실력의 부족함을 크게 느끼거나 좌절한 적은 없었다. 필자의 기준이니까 혹시 이 글을 읽게 되는 대부분의 한국 뮤지션들 역시 해외에서 잼 세션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필자가 일본에서 여러 재즈 클럽들을 다녀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부분은 재즈라는 음악이 일본에서 문화적으로 맡고 있는 역할이었다. 넓디넓은 도쿄 대부분의 동네에는 어딜 가보아도 멀지 않은 곳에 재즈 클럽이 꼭 하나쯤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의 여러 중소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출산율 저하로 대부분의 소도시가 실버타운화 되고 있는, 사실상 큰 위기에 직면한 일본의 현실이라지만 그런 인구가 적은 소도시일지라도 대부분 재즈 클럽이 한두 개쯤은 꼭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존재하는 재즈 클럽은 무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딱히 즐길거리가 없는 심심한 시골 마을에서 그 지역의 아마추어 연주자, 또 보통의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즐길거리와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비해서 수도(도쿄)로 집중되는 경향이 덜한 일본에서는 꽤 실력이 대단한 프로 연주자들도 자신이 태어난 지역에서 죽을 때까지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꼭 도쿄가 아닌 곳에 있는 재즈 클럽에 가보더라도 대단한 연주자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어떤 지역의 재즈 클럽을 가더라도 훌륭한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 지역의 아마츄어 연주자들도 비교적 준수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이 부를 노래에 대해 설명하는 보컬리스트. 뒤의 베이시스트, 피아니스트가 이날의 호스트 연주자였다.

또 한 가지 부러웠던 점은 일본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잼 세션이 경쟁하는 분위기보다는, 모두 함께 즐기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필자가 처음 한국의 팜(Palm)이라는 유명했던 재즈 클럽의 잼 세션을 찾았을 때 대단한 실력을 지닌 프로 중에서도 프로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라 경쟁하는듯한 느낌으로 펼쳐지는 잼 세션의 분위기에 분명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실력과 분위기에 압도되어 쉽게 잼 세션에 참여하기 힘들 만큼 겁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에 반해 일본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잼 세션은 경쟁보다는 친목의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긴장감 넘치는 대단한 연주자들의 격렬한 잼 세션의 분위기가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많이 키워내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아마츄어 연주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높은 진입장벽이 되지는 않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션을 마치고 해가 저물 때쯤 도착한 산겐자야의 새로운 숙소 휴게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날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역시 같은 공간에 휴식을 취하려 들어온 일본인 친구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었다. 여의도 한강에서 열리는 밤도깨비 야시장에 꼭 가보고 싶다는 이 천진난만한 친구를 보면서 어쩌면 나의 일본 문화에 대한 생각들도 일본에 대한 동경심 때문에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대한민국 역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문화 강국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기자기한 산겐자야의 심야 주점들.

두 시간여의 평안하고 여유로운 오후 2시의 잼 세션을 즐기면서 나는 어쩌면 일본 사람들 속에 깊이 녹아있는 일본의 이름 모를 유유자적한 정서를 잠시나마 누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이제는 코로나로 인해 어디서도 잼 세션을 즐길 수 없는 요즘이라지만 언젠가 다시 공연 문화가 되살아나고, 또 한국의 재즈 뮤지션들이 다시 활발하게 잼 세션을 즐길 때가 오면 그 어디에선가는 누구나 부담스럽지 않게 참여할 수 있는 편안한 잼 세션도 하나쯤 생겨났으면 하고 나는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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