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가마쿠라 고교 방문 이야기
나는 2010년경
아직 스마트폰도, 저가항공도 없던 시절 두 번의 도쿄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한 번은 공연 관람을 위해 일본에서 살다온 친구를 따라 그저 관광객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여행이었고, 또 한 번은 지금은 너무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한국인 관광객이라고는 나와 내 친구뿐이었던 <가마쿠라> 지역으로의 자유 여행이었다.
도쿄 근교의 <에노시마>라는 지역에 가면 큰 창문들이 사방에 붙어있어 시원하게 주변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들어진 <에노덴>이라 불리는 로컬 전철을 탈 수 있다. 이 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듬성듬성 건물들이 지어진 고즈넉한 시골 마을을 지나 열차 양쪽으로 겨우 한 뼘 남짓 될 것 같은 주택과 주택 사이로 난 철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고 나면 곧이어 열차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해변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가끔 눈에 띄는 바닷가를 거니는 학생의 모습조차 한 폭의 그림 같아 보이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조금만 더 달려가다 보면 이윽고 공동묘지가 붙어있는 작은 무인역 <가마쿠라 코코마에> 역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슬램덩크>라는 일본의 인기 만화 속 <능남 고교>의 모델이 되어 일본인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가마쿠라 고교>라는 학교가 있다.
간이역에 내려서 슬램덩크의 애니메이션 오프닝에도 등장하는 <가마쿠라 코코마에> 역 건널목을 지나 역 반대편으로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학교 정문이 보인다. 지금은 너무 많아진 관광객들의 방문을 막기 위해서 더 이상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가마쿠라 고교는 내가 방문했던 당시만 해도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우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쉽게 교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 넓은 학교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다 보니 운동장에서 훈련 중인 야구부가 눈에 띄었다. 야구부 코치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될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더니 그는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나와 내 친구는 수업이 끝난 적막한 학교 건물 안을 한 층, 한 층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낡은 커튼과 창문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오니 교실 안을 떠돌던 먼지들 마저 눈부시게 빛을 내던 방과 후 교실의 풍경은 오래된 학교라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마치 일본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아 왔던 아련한 학창 시절 교실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글씨가 남아있는 칠판과, 낙서와 칼자국이 가득한 책상, 그리고 숙제 같은 것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실 뒤편의 어지러운 게시판 등 여기저기 남아있는 학생들의 물건과 흔적들을 마치 박물관을 찾은 손님들처럼 넋을 놓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건물 4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투박한 악기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음악가인 친구와 나의 촉이 발동했다.
"혹시, 밴드부 아이들이 연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음악가인 우리가 밴드부 학생들을 만나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이라 직감한 친구와 나는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교실들이 배치된 4층 복도를 지나 도서실 같은 별실들이 모여있는 건물 5층에 도착하자 우리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작은 쪽문이 반쯤 열려있는 5층 별관 복도의 조그만 방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쪽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교복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마쿠라 고교의 밴드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은 우리가 어설픈 영어로 한국에서 여행 온 음악가들이라고 소개하자 뛸 듯이 기뻐하며 아무 곡이나 좋으니 하나 들려달라며 자신들의 악기를 내밀고는 정말 말 그대로 방방 뛰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고는 낡은 기타에 걸린 녹슨 줄을 튕기기 시작했다. 나는 기타를 연주하고 친구는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브라질 음악 거장 Antonio Carlos Jobim의 곡 <Chega de saudade>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편없는 악기에 그리 대단한 연주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무슨 해외 스타를 보는 것 마냥 우리를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던 아이들은 학교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우리 손을 붙잡고 어디론가 우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서로 의사소통을 했던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밴드부 아이들의 고사리 손에 이끌려 아이들의 친구들과 연신 인사를 나누며 학교 구석구석을 즐겁게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마쿠라 고교 탐방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미 만화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가마쿠라 고교 방문은 필수 코스 중의 하나였고 그중 뭐니 뭐니 해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가마쿠라 고교의 체육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2010년 당시에는 이미 과거 슬램덩크의 모델이 되었던 기존의 체육관 건물은 허물고 새 체육관 건물을 지은 상태였다.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것은 나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방과 후 일본의 고등학교 체육관을 직접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 나는 훨씬 더 좋았다.
이미 학교 수업이 끝난 시간임에도 생각보다 체육관에는 많은 학생들이 남아서 다양한 운동들을 즐기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익숙한 듯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체육관에서 친구로 추정되는 아이들을 하나 둘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원래 밴드부 멤버라는 친구가 하나 더 합류했고 저 멀리서 평행봉을 연습하던 까불까불 한 여자아이 하나도 우리가 신기한 듯 슬금슬금 다가왔다. 여전히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다섯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 의사소통이란 게 다 서로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법이다.
한참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나와 내 친구는 해가 저물 때쯤 다시 도쿄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숙소가 도쿄 신주쿠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게 움직이는 게 좋을 터였다. 잠깐이었지만 그새 정이 들었는지 서운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나 또한 아쉬웠지만 마지막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벌써 10년이 지난 그날이지만 나는 가마쿠라 고교의 아이들과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 중에서도 유독 아직까지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대화가 하나 있다. 바로
"앞으로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라는 진부한 내 질문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었다.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산림 관리원', '이발사', '목수' 같은 각자의 장래 희망들을 한 명 한 명 막힘없이 대답해 나갔다. 다소 소박하다고 생각하는 장래희망들을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분주하게 매진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 현대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수수한 복장에 까무잡잡한 얼굴로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해 질 녘 노을빛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그저 멋지고 예쁘게만 보였다. 도쿄로 돌아가는 우리들을 향해 꽤 오랫동안 손 흔들며 인사하던 아이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던 노을 낀 가마쿠라의 풍경을 나는 아마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는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나는 순수했던 가마쿠라의 아이들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렸다. 10년이 지난 지금 분명 어딘가에서 훌륭한 어른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 아이들. 아마도 그 아이들 덕분에 지금까지 도쿄에 대한 작은 그리움 한 조각을 갖고 살아왔던 건 아니었을까? 계속되는 정치적 이슈로 말 많은 일본이라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